도교 천사도의 창시자 장도릉(張道陵)
장도릉은 패현(沛縣 - 漢의 沛郡, 安徽省 宿縣의 서북쪽 땅)사람이다. 그의 모친은 북두칠성 중의 하나인 괴성(魁星)이 자신의 품속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장도릉을 낳았다고 한다.
본래 태학(太學)의 학생으로서 널리 오경(五經)에 능통했으나 만년이 되어 “이런 일이 수명(壽命)에 있어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구나” 고 탄식하고 장생(長生)의 도를 배웠다.
황제구정단법(黃帝九鼎丹法)이라는 것을 얻어서 이것을 조제(調劑)해 보려고 생각하여 약품을 구하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단의 약재가 모두 돈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장도릉의 집은 본래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워 보았지만 자신이 잘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침내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
촉 땅의 사람들이 순박하고 인정이 많아 교화하기 쉬우며 또한 명산도 많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촉 땅의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수련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정신의 연마에 힘쓰고 있자니 어느 날 홀연히 하늘에서 수많은 신선들이 내려왔는데, 이들이 타고 온 말과 수레는 황금수레에 깃털 장식의 일산에 덮여 있었고, 용과 호랑이가 끄는 것이 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주하사(柱下史:노자를 칭함)라고 하고, 어떤 이는 동해소동(東海小童:上相淸童君의 별호)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장도릉에게 신출정일명위지도(新出正一名威之道)의 법을 전해주었다.
장도릉은 이것을 전수 받고 난 뒤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를 스승으로 섬겼고 제자들이 수만 호(戶)에 이르렀다.
장도릉은 제자들 중에서 제주(祭酒)를 세워 그 집들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마치 관장(官長)과도 같았다. 그리고 조칙과 법제를 세워 여러 제자들을 부리면서 일에 따라 미곡, 비단, 기물, 종이, 붓, 땔나무, 집기 등을 바치게 했다. 사람들을 시켜서 도로를 수리했는데 수리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질병에 걸리게 했다.
마을에 반드시 손을 봐야 하는 다리나 길이 있으면, 백성들은 풀을 베고 더러운 물을 치우는 등, 하지 않는 일이 없었지만 모두가 자의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들은 장도릉이 그렇게 만든 것임을 모르고 이 제도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도릉은 또한 염치(廉恥)로서 사람들을 다스리고자 했으며 형벌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에 조칙을 만들었는데 질병이 생긴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자신이 태어난 이래로 범한 죄를 기록하여 물에 던져서 신명과 약속을 해서 다시는 법을 어기지 않을 것을 목숨으로 맹세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유념하여 질병에 걸리면 바로 죄과를 고백했다.
이것은 첫째로 병을 낫게 하고, 둘째로는 부끄럽게 해서 다시는 법을 범하지 못하게 했으며, 또한 천지를 두려워하게 해서 잘못을 고치게 했다. 이렇게 된 이후로는 법을 어겼던 자들도 모두 착한 사람이 되었다.
장도릉은 많은 재물을 얻자, 약재를 사서 단약을 만들었다. 단약이 완성되어 반만 먹었는데 이것은 승천하기를 바라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분신술로 수십 명의 장도릉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사는 문 앞에는 연못이 있어서 장도릉은 항상 배를 타고 그 안에서 노닐었다. 여러 도사와 빈객들은 장도릉과 만나 대화라도 해보기 위해 항상 찾아왔던 까닭에 앞마당과 거리는 항상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좌석에는 항상 한 명의 장도릉이 앉아서 빈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진짜 장도릉은 연못에서 유유하게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장도릉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중 대부분은 속인(俗人)의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속세를 버리고 승선(昇仙)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나의 행기(行氣), 도인(導引), 방중(房中)의 술(術)을 알거나 혹은 초목을 복식(服食)하여 수백 년 동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나에겐 ‘구정대요(九鼎大要)’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왕장(王長)에게만 전해 준다. 또 장차 동쪽 지방에서 오는 자가 있어 이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 사람은 반드시 정월 7일의 한낮에 도착할 것이다.”
하고 그 신장이나 용모를 자세히 말했다.
그 날이 되자 과연 조승(趙昇)이라는 자가 동쪽으로부터 찾아왔다. 평소에 본 일도 없는 사람인데 그 용모가 정말 장도릉이 말한 그대로였다. 이리하여 장도릉은 여러 번 조승을 시험하여 모두 통과했으므로 단경(丹經)을 조승에게 주었다.
장도릉은 조승을 모두 일곱 차례 시험하였다. 마지막 시험은 높은 절벽 아래 복숭아나무에 열린 복숭아를 따오라는 시험이었다. 장도릉이 여러 제자들에게 “누가 저 복숭아를 따올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도의 요결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니 함께 있던 2백여 명 모두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오직 조승만은 “스승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저 복숭아를 딸 수 있기 때문이다”하고 몸을 나무 위로 던지니 헛디디지 않고 무사히 복숭아를 딸 수 있었다.
이어서 장도릉은 절벽아래를 보며 “나 또한 복숭아를 따 보리라”하며 떨어졌는데 갑자기 그 형체가 사라졌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는데 다만 조승과 왕장만이 “스승은 곧 아버지다. 우리가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하고 함께 몸을 던져 아래로 뛰어내리니, 바로 도릉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장도릉은 조승과 왕장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면서 “나는 그대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하고 두 사람에게 완전히 도를 전수하고 3일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장도릉은 조승, 왕장과 함께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일승천(白日昇天)했다. 여러 제자들이 바라보니 한참 만에 작아지다가 모두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 장도릉이 촉 땅의 산에 들어가서 단약을 만들어 반만 먹었을 때, 비록 승천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지선(地仙)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장도릉이 전파한 사상과 치료법은 그 당시 백성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서 그의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그가 치료를 하고 난 뒤에는 쌀 5두(약 9리터)를 내도록 한 것에서 그가 창시한 종파를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 했다. 또 장도릉을 높이 칭송하여 장천사(張天師)라는 경칭으로 불렀는데, 이후 천사라는 명칭은 장도릉의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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