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종교

[스크랩] 도교란 무엇인가

검은바람현풍 2011. 9. 10. 18:40

도교란 무엇인가

 

 

   1. 도교란 무엇인가

      '도교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학자들 간에 다양한 논의가 있어 왔고 따라서 아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도가라는 이름에다가 神仙道와 天師道를 혼합하고 거기에 민간신앙을 포함해서 불교와 유교의 교의와 의식을 융합시킨 것. 노자를 신격화하고 長生昇天을 교지로 하며 消災滅禍를 위해 모든 方術을 행한다.

     2) 도는 유교와 도교에 모두 통하지만, 중국 민족의 사회·정치상의 정통은 유교이며 도교는 이단이다.

    3) 공자의 유교는 합리주의적인 것인데 비해, 도교는 신비주의적이고 은둔·명상적인 노자를 내세워 주술에 의한 병의 조복과 자연력의 지배를 설한다.

      4) 노자는 도 또는 자연의 일원론을 설하는데, 도교는 도의 최고관념을 至高神으로 하고 그것을 天·上帝로 삼는다. 도교에서는 천·상제라는 유일 최고신이 정치성을 상실하고 옥황이 되었다. 이 유일 최고신의 지배하에 몇 단계를 이루고 있는 다신이 신앙된다. 옥황 이전에는 노자를 신격화했던 太上老君과 元始天尊이 최고신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三淸  등도 만들어졌기 때문에 交替神敎라고도 할 수 있으나, 세계 대종교와 같은 일신교라 말할 수 없다.

      5) 도교는 중국의 민중종교로서 일본의 신도나 인도의 힌두교 등과 대비된다. 일본에는 중국과의 문화교류에 의해 유교·불교는 일본에 전해졌지만 도교는 일본에 전래되지 않았다. 도교는 중국사회의 모든 계층, 특히 서민층의 욕구를 반영하는 종교이다. 관료지배층  도사적으로는 도교를 신봉하였고 관직에서 물러나 민간인이 된 지식인들, 즉 逸民은 도     교의 교리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6) 중국민간의 주술적 신앙, 노장사상, 신선사상 및 다른 여러 가지 잡다한 종교적 또는 의사 종교적인 모든 요소가 결합한 것이 도교이다. 그것이 교단으로 처음 조직된 것은 후한 말로서, 당시 농촌사회의 정세와 민중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도교는 중국의 민   족적인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 중국 고대의 샤머니즘적인 주술신앙을 기반으로 하면서, 유가의 신도와 제사의 의례·사상, 노장사상의 '玄' 과 '眞' 의 형이상학을 그 상부에 두고, 거기에다가 불교의 교리·의례 등을 복합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수·당 시대에는 교단으로서의 조직과 의례를 일단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도의 불멸'과 일체가 되는 것을 궁극의 이상으로 하는 중국 민중     의 토착적이고 전통적인 종교가 도교이다.

      8) 도교는 神祠의 종교와 구분되는데, 후자에는 민중의 여러가지 현세적인 이익을 지켜주는 신들이 있다. 이것은 고대의 방사·무축의 신사 계통에 속한다. 신사·사묘의 신들은 불교·도교·민간종교의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대부분 자연력·동물·역사상의 인물 등 민간종교의 신들이며, 순수한 도교의 신은 적다.

      9) 도교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인 및 중국사회의 문화복합체이다. 거기에는 철학·사상·종교·미신·민중의 생활·풍습·관행·도덕·문학·예술·과학 등의 요소가 있다. 풍토와 지역적인 조건을 근간으로 하고, 정치·사회·문화의 각 현상과 관련을 맺으면서 중국의 역사를 통해 전개된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위의 견해들은 도교 및 불교사가들의 견해들이다. 이 학설 중에 2)의 견해처럼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 본것도 있으나 9)와 같이 사상·신앙·사회·정치를 총괄하는 종합적인 문화사의 입장에서 설한 것도 있다. 특히 후자의 입장은 중국인 고유의 문화를 정치·사회와 관련시켜 유교와 도교라는 두개의 상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 양교를 문화복합체라고 보는 것이다.

 

2. 도교의 역사

 

   1. 고대의 신들과 신앙

      금세기 초부터 시작된 갑골문에 대한 해독과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중국의 사상과 종교의 근저를 관통하고 있는 天(神)관념의 기원에 대하여 확실한 안목을 갖게 되었다. 은왕조는 조상신이 보여주는 점복의 결과로 자신의 행동의 진퇴에 대한 가부를 판단했다. 이와 같이 점을 치는 행위는 인간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으로 여기서 우리는 은대인이 갖고 있던 심각한 숙명관을 엿볼 수 있다. 은을 계승한 주대에서는 사람들이 존숭하고 신앙하던 대상이 帝에서 天으로 옮겨갔다. 즉 은대인들은 제를 은총을 내려주는 조상신으로 이해했던 것에 비해 주나라 사람들은 천을 어떤 민족과도 사적인 관계가 없는 공평무사한 至上神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이 보편적이고 인격적인 최고의 신으로서 천의 존재를 확정함으로써 일찍이 은나라 사람들이 가졌던 결정적인 운명관의 중압을 극복하고 근소하게나마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에 대한 주체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중국의 사상· 종교사적으로 볼 때 특기할 만한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천명주의적인 사 상은 유교의 정치·도덕에서의 특유한 윤리관념과 도교의 功過應報사상과 결부되어 확실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주대에 들어서도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원리로서 天에 대한 숭배와 나란히 조상신 숭배에 대한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정치체제가 씨족적인 조직위에서 세워진 이상 조상신과 천신, 양자에 대한 숭배는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반대로 조상신과 천신은 서로 반발하는 일 없이 서로간에 새로운 혈연적인 융합관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토대를 갖고 융합되는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면을 발전시켰던 것이 묵가의 인격적인 천이고 정치적, 윤리적인 면을 발전시켜 온 것이 다름아닌 유가 및 도가의 理神論적인 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인 천의 관념은 공자, 묵자, 맹자, 장자, 순자 등에서 다양한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에 성행한 음양오행설의 영향에 천의 인격적인 성격은 크게 약화되어 천은 우주와 세계의 원리적인 존재처럼 되어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에서 철학적인 사색의 대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天의 理法性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해서 도교의 교설의 핵심을 형성하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게 되었는뎨 그것은 다름 아닌 원초적인 신선설로 불로불사의 신선이 되기 위한 방술을 설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고대 역사서 가운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기의 봉선서에는 기원전 3,4세기 경 발해 연안에 위치한 제와 연에서는 제후들이 동해에 있다고 전해지던 3개의 신산 영주·방장·봉래에 사람을 보내서 仙藥을 구하려 했다는 것과 함께 당시 제후들 가운데 신선설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2. 원시도교 교단과 그 동향


     1) 太平道와 五斗米道

        중국 역사에 기록된 크고 작은 정치적 반란 가운데 어느 정도라도 정치적 색채를 띤 것이 대단히 많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 중 특히 종교적 색채가 농후하고 거대한 세소적인 세력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황건적의 난 즉 태평도의 난을 들 수 있다.

 

        태평도의 교법은 태평청령서에 기초한 것으로 20년간 완강한 저항을 벌여 후한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시대에 이러한 반란이 속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태평도만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후한왕조를 뒤흔들었다는 것은 태평도 교법이 종래의 단순하고 소박한 주술적인 치료 신앙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교리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  실을 추측케 한다. 예를 들어 태평경 중에 대낮에 승천해서 시해선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보이는 등의 사실에서 태평도의 교범에 신선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태평도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서쪽에서 張陵에 의해서 창도된 五斗米道 교단이 출연해서 2대 張衛, 3대 張魯에 이르까지 약 20여 년 간에 陜西에서 四川지방엑가지 이르는  지역에 종교와 정치 및 군사 등에 지배권을 가진 종교왕국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 교단은 魏나라 조조에게 항복한 뒤에는 위정권에 협력하면서 겨우 종교활동만을 했다. 그러나 후에 중국 지배층에 의해 작성된 후한서에 이들이 요망한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위험한  반국가집단이라고 선전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두 교단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단순 한 치병을 목적으로 하는 낮은 차원의 주술적인 교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두미도의 교법은 노자도덕경의 주석서인 노자상이주를 통해서 검토하여 보면 태평경의 교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노자상이주에는 일찍부터 도교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으며 도  교의 기본적인 교설인 삼관응보설이 이미 오두미도에 설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원시도교 교단의 기반

        농업생산량의 급증으로 인해 농촌에서 계급 분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대토지 소유자로서 호족이 등장하여 자작농을 중심으로 공동체적인 성격을 보존했던 자치적인 촌락 즉 里는 해체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함께 里 공동체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처이며 공동  체의 제사 대상이기도 했던 社神의 존재 가치가 미미해지고 그 종교적인 권위도 약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里의 구성원으로서 누리던 사회적 보호는 물론 社神의 정신적 비호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불안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한 말의 혼란과 대규모의 기   근과 질병의 만연 때문에 중국 정신사상 최초로 공동체 신에서 개인신으로 향하는 새로운   정신적 지향의 발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3. 도교 교단의 성립과 교학의 발달


    1) 천사도의 형성과 발전

      오두미도가 천사도의 명칭으로 불리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지만 황건적의 난이 진정되고 태평도 교단이 없어진 바로 직후가 되는 3세기 초엽 까지 소급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천사도는 남북조 시대 동안 도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 후에도 역대  천사의 통솔하에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신천사도의 출현

       남북조 시대에 동진왕조를 따라 남하한 북방귀족에 의해서 천사도가 강남 각지에 퍼진 것과 대조적으로 五胡의 지배속에서도 견디며 북방에 머물고 있었던 한인 귀족 중에서 뛰어난 도교의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이가 바로 寇謙之이다. 구겸지는 천사도를 그 당시 북중국을 통치하고 있던 북위 정권과 협력하여 도교를 북위의 국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3) 신선사상의 집대성

       초기의 신선 사상을 집대성해서 도교 교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갈홍의 抱朴子가 완성된 것은 동진 건무 원년 317년의 일이다. 포박자의 내편은 신선이 실제함을 역설하고 신선이 되기 위한 선약 제조법과 복용법 및 기타 장생을 가능하게 하는 보조적인 선술을 20권에 걸쳐 상술한 것이다. 이러한 포박자에 수록 된 방대하고 합리적인 지식은 선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서 전승된 것이 적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선도의  정통파로 자처하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금단술과 다른 불로상생법을 설하는 민간싱앙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다. 또 장각의 태평도의 난에 대해서도 소술로서 어  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옳고 그름을 접어두고라도 적어도 이 시점에서 신선술이 분명히 단계적  인 분열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도교 교학으로 자처했던 그가 수련에 의해서 신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 것은 오로지 제왕을 위해 설해져 왔던 지극히 어려운 신선술을 보다 넓게 개방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포박자에서 말하는 번쇄한 금단  의 제조법은 일반 사람들에게 쉽지 않았을 터인즉 신선 신앙에 의해 신선이 되려고 하는 타력적인 구제설이 정통적인 것으로 승인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4) 도교 교학체계의 정비

       북위에서 구겸지에 의해 신천사도가 국가종교로 확립될 즈음에 강남 지역에서는 이때까지의 천사도와 계통을 달리하는 새로운 도교 교파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이 되었던 것은 송의 육수정과 양의 도홍경이다.

      우선 육수정은 송의 비호 아래 입수한 三皇經과 영보경 계통의 경전 등을 정리하고 더 나아가 泰始7년(471)에는 최초의 도교 경전 목록인 삼동경서목록을 만들었다. 이 목록은 기존의 경전류를 망라한 것에 그치지 않고 경전의 전승이나 교파, 학계 등을 계통적으로 정리해 놓고 있는 것이 특히 주목된다. 삼동경서목록에 수록된 경전류의 권수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일설에는 1228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포박자에 알려진 도교 경전류의 권수에 비하면 그후 약 1세기 반 사이에 대체로 두 배로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육수정의 삼동설을 계승하여 모산의 상청파를 중심으로 도교의 교리 체계를 三洞四輔― 太淸·太平·太玄·正一 ―라는 칠부의 조직으로 집대성한 이는 바로 도홍경이다. 그는 도교 경전의 정비에 큰 공적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상청도교학의 근원이 되는 眞誥를 교정 편찬하고 더욱이 갈홍의 금단술에 버금가는 새로운 신선술 즉 내면적인 정신순화에 의해서 도와 합일하고 장생에 이르는 이른바 守一이라는 신도론을 설한 登眞隱訣을 저술하여 이것들로 도교의 교학적인 기초를 확립하고 교단조직의 일체화를 향한 기반을 갖추게 하였다.

 

3. 도교의 생성과 분파

 

도교의 창시자하면 모두들 장도릉을 생각하지만 장도릉이전에 이미 방사란 부류가 있었다. 송나라 장군방이 집필한 운급칠참에 도교의 기원은 천시보다 훨씬이전이란 기록이 있다. 이는 내용이 황당부계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장자와 열자의 서적중에 언급된 막고야지산, 화서지구과 회상신선등의 우언들은 확실히 존재한다고 믿어 결국 신선설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런 신선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방사인 것이다. 방사의 기원이 언제부터인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진한 이전부터 이런 인물들이 존재했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진시황은 방사 서복의 바다 한가운데 삼신산이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믿고 동남동녀 오백명을 보내 신선과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했었다. 이이전 국책에는 형왕에게 불사의 약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 이후로는 한무제가 이소군 난대의 말을 믿고 높은 누각을 건립하여 신선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사기 봉선서에는 한무제가 신선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봉래,방장,영주 세섬중에 신선이 살고 있어 불사약을 구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황제가 되니 이제 신선이 되려고 한다는 일종의 그칠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할수 있다. 한무제는 후에 느낀바 있어 천하에 어찌 신선이 있을수 있겠는가. 요망스런 일이로다. 절식하고 약을 먹으면 병을 줄일수는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따라서 소위 신선이라는 것은 일종의 망상으로 옛사람들의 우언을 사실로 잘못 믿고 있었던데서 비롯되었다고 할수 있다. 제일먼저 신선에 관해 이야기한 사람은 굴원으로서 그의 원유장에는 진인의 숭고한 미덕을 귀중히 여기고 그들이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음을 더욱 찬미한다는 기록이 있고 다음 국책과 한비자중에서 불사약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형왕에게 불사의 약을 상납하는 자가 있었다. 그가 불사의 약을 들고 궁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궁중의 한 관리가 먹을수 있느냐고 물었다. 먹을수 있어라고 대답하자 다투어 먹어 치웠다. 왕이 이말을 듣고 대노하여 그 관리를 죽이라고 했다. 그러자 이 관리는 왕에게 신하가 묻기를 먹을수 있느냐고 했더니 먹을수 있다고 해서 먹었기 때문에 저는 죄가 없고 임금께 알현하고자 한자에게 죄가 있습니다. 또한 불사의 약을 헌상했는데 신이 먹자 왕께서 저를 죽이신다면 불사의 약이아니라 사약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알현하고자 한자가 왕을 속이게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죄없는 신하를 죽이시어 왕을 속인자의 죄상을 밝히시는 것이 신하를 살려주는 것만 같지 못하겠습니다고 말하자 왕이 죽이지 않았다.


사기와 한서에도 봉래성경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있고, 열자 습유기에도 모두 이런 선경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후에도 위백양의 삼동계, 갈홍의 포박자에도 모두 장생한다는 기록이 있어 그 영향은 상당히 컷음을 알수 있다. 여기에서 방사들이 장도릉이전에 매우 성행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수 있다. 장도릉은 도교의 한파인 부록파의 창시자로 본래이름은 장릉이고 한 환제때의 인물이다. 송나라의 진원정은 그를 위해 한천사가정을 지어 진인도릉은 자가보한, 성은 장씨로서 풍업사람이고 유후 자방의 8세손이다라고 기록했다. 장도릉은 어려서부터 오경에 통달했고 만년에는 대명산에 입산하여 장생의 도를 배웠고 그의 도를 배우려하는 사람에게 오두미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교를 오두미교라 불렀다. 그는 부적과 정화수로 병을 고쳤는데 병자에게 부적과 정화수를 마시게 하거나 병자의 이름을 적어 삼간에게 기도를 들였다. 그후 그의 아들 장형과 손자 장로가 계승발전 시키고 장도릉을 천사로 추대해서 이 호칭은 자손대대로 세습케 했다. 훗날 장각은 이런방법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름을 황건당이라 불렀다. 우길도 이방법을 이용해 병을 고쳤고 궁숭은 일찍이 부길신사라는 책을 헌상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부록파의 도교에 속한다. 도교에는 두파가 있는데 훗날 단정파와 부록파로 불리게 된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장생불사를 표방했고 후자는 질병을 고친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이둘은 모두 노자의 학설을 도용해서 이론적인 근거로 삼았다. 단정파는 한나라 초기에 생성되었고 부록파는 한나라 말기에 생성된 것으로 오두미교는 바로 부록파의 시초가 된 셈이다. 위백량이 지은 삼동계는 단정파의 주요작품이다. 삼동계란 명칭은 주역, 황로, 노화라는 세파의 사상이 대도의 경지에서 융화한다는 것이다.

갈홍은 포박자 내외편을 지었는데 내편은 도양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고 외편에는 단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갈홍이 나부산에 머물며 단을 연마하면서 사람이 도를 닦을수있다면 천지와 같은 수명을 누릴수 있다고 했는데 소위 도를 닦는다는 것은 삼동게에서 말하는 호흡법을 말한다. 이 호흡법이란 처음배우는 사람은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서 마음속으로 120을 세었을 때 서서히 숨을 내쉬는 방법으로 중요한 사항은 무리하게 힘을 주거나 급하게 해서는 안되고 또한 너무 오래 앉아있어도 좋지 않다. 생활과 음식물은 규칙적으로 섭취해서 원기가 체내에서 원활히 돌도록 해야한다. 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위생방법이 됨은 말할것도 없고 소위 말하는 방중술이라는 것도 일종의 성의 위생을 위한 것이다. 밖으로는 상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상약이란 바로 구전금단이란 것으로 광물을 소련하여 만든 것이다. 포박자에는 만약 이 상약을 먹으면 하늘을 날수 있어 천선이 될 수 있으며 비록 천선이 될 수 없다하더라도 성을 길러 병을 막을수 있기 때문에 천수를 누릴수 있게 된다고 되어 있다.

위백량과 갈홍의 주장은 매우 훌륭한 위생법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뿐만아니라 모두 선을 쌓고 올바로 행동한다는 도덕에도 중점을 두어 신비사상 가운데서도 도덕윤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도 상당히 많다. 장생이란 있을수 없을 뿐 아니라 후세에 도교로부터 파생된 미신은 모두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다음은 부록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파는 장도릉에 의해 창시되었지만 그완성은 도홍경과 구겸지 두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다. 도홍경은 어려서부터 갈홍의 신선전을 구해 탐독하면 양생수도의 뜻을 품었고 후에 구용산에 응거하며 자칭 화양진인이라 명명하고 도인과 벽곡의 수련방법을 택해 정진했다. 양무제는 일찍이 그와가까이 지냈다. 도홍경은 등진응결이란 책을 지어 신선이 될 수 있고 장생할수도 있다고 설파했다. 이것을 보고 양무제는 그에게 단을 만들라고 명령했지만 결국 만들지 못했는데 도홍경은 중원지방의 약물이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는 또한 부록에도 주력하여 남방지방에서 명성이 높았다.

구겸지는 순수한 천사도를 제창하고 부록파의 공고한 기초를 세웠다. 숭산에서 10년간 수도하고 자신은 일찍이 태상로군이 친히 하사한 천사의 직위와 운중수송심과계 12권을 하사 받았다고 속여 장시의 천사직위를 탈취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일찍이 선인 성공흥을 만났다고 말했으며 이보문으로부터 도록진경 60권을 받아 북위 태무제에게 진상했다. 제상인 최호는 그것을 깊이 믿고 천사도장을 건립해 120명의 도사를 모아 매일 기도를 했다. 당시 위문수, 기참, 나숭삼 등은 모두 유명한 도사들로서 모두 그를 따랐다. 구겸지는 자신이 직접 태무제에게 부록을 주었는데 이것이 크게 유행하자 자신은 이 부록으로 귀신을 부를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다한다. 또한 운중과계에 근거하여 제초과의를 제창하여 후세에 배참, 건초 등의 미신을 낳았다.

출처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글쓴이 : 지식창고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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