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북창 정염 北窓 鄭磏

검은바람현풍 2025. 1. 23. 09:46

丹學人物考.

   북창 정염 北窓 鄭磏

                                                          硏精會報 12 호 에서

 

 

[ 1506~1549, 本貫은 온양(溫陽). 는 사결(士潔), 는 북창(北窓). 시호 장혜(章惠). ]

1530(중종 25) 사마시에 합격, 음률에 밝고 현금(玄琴)도 정통, 장악원(掌樂院)주부. 천문·의약에도 조예가 깊어관상감(觀象監혜민서 (惠民署) 교수 겸임, 뒤에 포천현감(抱川縣監). ··(儒佛仙) 복서(卜筮한어(漢語)에도 정통, 문장, 산수화(山水畵)에도 능했다.제학(提學)에 추증되었다. 저서는 북창집(北窓集)》 《동원진주낭(東垣珍珠囊)》 《유씨맥결(劉氏脈訣)》 《북창비결(北窓祕訣).

 

북창 정염(鄭磏) 선생은 1506(중종 원년) 3월에 태어났다. 선조는 백제 탕정현(오늘의 온양) 사람이며 부 순붕 은 중종 인종 명종 세 임금을 섬긴 분이며 모친은 태종의 長王子 양녕대군 제()의 증손녀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신이(神異) 하였다 한다. 소시에 산사에서 육통법을 시험 해 보려고 삼일동안 정관하였더니 백리 밖의 일을 훤히 알았다. 이로부터 천문 지리 의학 복서 율려 산수 한어 및 외국어를 두루 배워서 못하는 바가 없었다. 비록 천리 밖의 일이라도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집중하면 곧 알아내었다. (해동이적에서)

14세 때에는 중국을 관광하였는데 봉천전(奉天殿)에서 도사를 만났다. 도사가 묻기를 귀국에도 도사가 있습니까하므로 선생께서 거짓으로 답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삼신산이 있어 한낮에도 신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도사가 무어 그리 귀할게 있겠소?” 하였다. 도사는 크게 놀라 어찌 그럴 수 있겠소하며 다시 물었다. 이에 선생은 즉시 황정경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 등의 도경을 들어 신선이 되는 계제를 밝게 설명하니 도사는 굽실거리며 슬그머니 피하여 버렸다.

이 때 유구에서도 사신이 와 있었는데 역시 이인이었다. 그는 자기나라에서 역수(易數)로 헤아려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줄 알았다. 그래서 길을 따라 들어가며 북경에 도착해서 여러 나라 사신이 있는 관저를 두루 찾아보았으나 진인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을 만나게 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며 행낭(行囊)에서 조그마한 책자를 꺼내는데 거기에는 모년 모월 모일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선생에게 보이면서 이른바 진인은 선생이 아니면 누구겠소하면서 역학(易學) 배우기를 요청하였다. 선생은 쾌히 승낙하고 유창한 유구말로 주역을 가르쳤다. 이에 관저 안에 있던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고 다투어 와서 그 장면을 구경하였다. 선생은 각국 사람들을 대하여 각기 그 나라 말로 유창하게 응수하니, 다른 사람들이 놀래어 하는 말이 사람은 이니오 천인(天人) 이라 하였다.

어떤 이가 선생에게 묻기를 세상에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해독하는 사람이 있으니 다른 나라의 말은 곧 새나 짐승의 소리와 같습니다. 그 말을 해독하는 것은 간혹 있을 수 있는 일이나 그 나라 말을 입으로 하는 것은 또한 다르지 않습니까?” 하였다 . 선생은 대답하기를 난 듣고서 해독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은지 오래 되었소.” 하였다.

한사람이 자기 운명을 묻는데 그 앞에 객관에서 품팔이로 땔나무를 나르는 사람이 있었다. 보니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너도 할 말이 있느냐?” 하여 함께 말을 나누어 보니, 음양운화의 기이한 술법을 통한 사람이었다. 선생이 네가 어찌하여 품팔이를 하는가?” 하니, “이렇게 살지 아니하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촉나라 사람입니다. 아무 해에 아무데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선생은 벌써 만물에 신통하여 무궁한 경지에 들어가셨으니 도덕경에 문을 나가지 아니하고도 천하의 일을 안다고 한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봅니다하였다.

선생은 유··선 삼교(三敎)를 관통하였으나 근본을 성학(聖學)에 돌려 그의 유훈(遺訓)에도 효제(孝悌)를 오로지 힘쓰게 하였고 소학 근사록을 초학자의 지름길로 삼았다.

일찍이 선생께서는 성학은 인물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긴요하고 오묘한 곳을 말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선불(仙佛)은 오로지 마음을 닦고 본성을 깨닫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상달(上達)한 사람은 아는 것이 많고 하학자(下學者)는 단순하니, 이것으로 해서 삼교가 다르다고 하는 것인데, 선 불은 대동소이 한 것이다하였다.

선생은 평생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나 술 마시기를 즐겨하여 한자리에서 몇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또한 선생은 음율을 잘 알아서 노끈으로 술병을 묶고 구리 젓가락 하나를 그 속에다 꽃고 다른 하나를 가지고 술병을 두드리면 56율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휘파람을 잘 불었다.

그의 아버지 순붕이 강원 감사로 있던 어느 날 부자는 금강산에 노닐게 되었는데, 마하연(摩訶衍) 암자에 이르자 선생의 부친이 뒤를 따르던 아들을 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네가 휘파람을 잘 분다고 하는데 내가 아직 듣지를 못했다. 이런 절경에 왔으니 한 곡조 불어볼 만 하겠느냐?” 하고 휘파람 불기를 청하자 선생은 고을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와 있으니 청컨대 내일 비로봉에 올라가 불겠습니다하고 여쭈어 그의 아버지 순붕의 허락을 받았다. 다음날은 비가 내렸는데 선생은 비를 무릅쓰고 봉우리로 올라갔다. 순붕도 올라가려 하였더니 중이 말리면서 오후가 되면 비가 개일테니 그때 올라가라고 하였다. 비 오는 날 비로봉에 오르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오후가 되니 과연 비가 개어 중은 앞에 서서 순붕을 인도하여 봉우리로 올라갔다. 기암절벽으로 싸인 산골짜기에 이르니 어디선가 피리 부는 소리가 맑고 높게 암석을 울리기 시작 하였다. 중은 놀라 순붕을 보며 이렇게 깊은 산속에 웬 피리소릴까요? 경치가 기가 막히니 신선이 내려왔나 봅니다하였다. 순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피리소리가 아니라 아들이 부는 휘파람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우야담에 이르기를 정염의 휘파람소리는 손등(孫登) 완적(院籍) 소문(蘇文)의 휘파람이 따라가지 못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정에서 선생이 천문 의약 율려에 능통하다 하여 장악원(掌樂院) 주부를 시키더니 그 후 관상감(觀象監) 혜민서(惠民署) 교수(敎授)로 임명하였다. 외직으로 포천현감(抱川縣監)을 하게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양주의 괘라리(掛蘿里)라는 곳에서 두문불출하고 연단화후법(練丹火候法)에 몰두하며 살아갔다.

하루는 자신의 만가(輓歌)를 지었는데

     일생동안 만권의 책을 읽고

     하루에도 천잔의 술을 마셨네

     太古적 일에는 소리 높여 담론하나

     속된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않았네

     안자는 30을 살았어도 아성이라 불렀는데

     선생(자신을 지칭)의 수는 어찌 그리 긴고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앉은 채로 세상을 뜨니 이때 나이 44세였다.

세상에서는 북창선생이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스승이 없다고 전하지만 해동전도록을 보면 정희량에게서 도른 전수받은 대주(大珠)에게서 사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제자도 없다고 전하나 용호결(북창결)을 내놓아 많은 사람을 가르쳤으나 후세에 이를 보고 단을 익힌 사람은 누군들 제자가 아니겠는가?

선생의 무덤은 양주 사정산(砂井山) 선영 아래 있으며 비석이 있다.

 

선생에게는 지복(之福) 지임(之臨) 두 아들이 있었으나 둘 다 요절하였고 조카 지승(之升)의 아들 시()가 북창의 가계를 잇게 되었다.

선생의 아우 고 옥 (정작)의 만시(輓詩)

수문계아성 修文繼亞聖 글을 닦아 아성을 이루었으나

염세화태선 厭世化胎仙 염세 끝에 태선으로 화했네

적막삼생화 寂寞三生話 적막하구나 삼생의 얘기여

라고 하였다. 고옥은 북창선생의 막내아우로서 이름을 작()이라 하고 를 고옥(古玉)이라 하는 이인이다.

일찍이 형 북창선생으로부터 단학을 배우고 후에는 수암 박지화를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수련하였다. 수암 박지화는 본관이 정선이며,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북창과도 찬했는데 어려서부터 명산을 찾아 놀았으며 솔잎을 먹고 생식을 하였던 인물로 이 분 역시 유불도 삼도에 조예가 깊었고 예서에도 정통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던 분이다. 70 여 세에 금강산을 유람할 때 여러 길 되는 물을 뛰어넘고 걸음이 나는듯하여 중들이 놀라기도 하였지만 임진왜란 때 친구와 함께 피난 가다가 내가 금년까지 무슨 소용이 있어 구차하게 사는가하고서 날짜를 정해 스스로 수해(水解) 했다고 한다.

고옥은 성정이 맑고 깨끗하여 여색을 멀리하고 책읽기를 좋아했으며 시에 능하고 의술 방술(方術) 등에 모두 능통한 사람으로 평생에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았다고옥은

     "백수참동계 白首參同契 흰머리는 참동계 때문이고

     홍안국미주 紅顔麴米酒 붉으레한 얼굴은 국미주 때문이다"   라는 시도 지었다.

고옥은 선조 29(1596)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하고 벼슬은 사평(司評)까지 지냈으나 그의 부친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가담하자 벼슬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하여 일생을 금단의 연마에만 마음을 쏟았다.

고옥은 늙어갈수록 큰 형 북창과 함께 단학을 공부하여 시를 짓던 때가 눈에 선한 듯 시를 지어 형을 추모했다작은 선조 갑진년(1603)에 하찮은 병으로 71세에 앉은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벗으로는 임진왜란 의병장 이순(而順), 고경명(高敬命)이 있으며 선배로는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가 있다.

 

그리고 고옥의 사촌형인 계헌(桂軒) 정초(鄭礎)는 수붕(壽朋)의 아들로 자는 정수(靜叟)이며 중종 17(1552)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또한 단학공부에 정성을 다 한 이인이라 한다. 정초의 방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다음과 같은 시를 선사하였다 한다.

     계향방복도 桂香方馥都 계수나무 향이 자욱하니

     선어자천래 仙馭自天來 선녀가 말을 몰아 하늘에서 왔네

이로부터 그의 에 계()자를 썼다 한다.

이 분 역시 연산 을묘년(1493)에 태어나 중종기해년(1539)에 선화하였다고 전한다.

한 집안에 이처럼 세 사람의 이름 난 단객(단객)이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은 드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