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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學 관련 글. 수진구요 修眞九要

검은바람현풍 2025. 1. 13. 13:39

丹學 관련 글   

  수진구요 修眞九要

 

서문 序文

참됨을 닦는 도는 천하제일의 큰일이며 또한 천하제일의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것이 지극히 크고도 어렵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천하의 希有한 일이라 한 것이다. 이 일은 조화에 밝고 음양을 통철하며 경서에 뜻을 두어 오래도록 변하지 아니하며 점진적으로 닦아나가는 자가 아니면 능히 행할 수 없다.

후세의 학인들이 이 일을 궁구하지 않는다면 달리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일찍이 도를 배우지 아니하고도 즉시 도를 이루고자 하고 사람의 길을 배우지 아니하고 곧바로 신선이 되고자 하니 도를 닦는다는 자들이 소의 털과 같이 많은데도 실제 도를 이루는 자는 기린의 뿔과 같이 적음이 조금도 괴이함이 없다 할 것이다.

내 어려서부터 도를 사모하였으나 正人을 만나지 못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이에 마음은 어지럽고 몸은 아쉬워져 거의 해만 입게 되었다. 후에 다행히 스승 감곡노인을 만나 대략의 香風을 얻어듣고 비로소 종전 수행의 허물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천하 도인들의 태반이 모두 그릇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스승의 뜻을 서술하여 修眞하는 강령을 아홉 가지로 나누고 修眞九要라 명하였다. 그 법이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이끌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게 하니 초학자들을 위하여 차례대로 단계를 마련한 것이다.

도를 배우는 자(學道)나 닦는자(修道)를 막론하고 이 구요를 의지하여 순서대로 닦아나가면 마침내는 반드시 자득하게 될 것이다.

또한 능히 눈 먼 스승(盲師)과 눈 밝은 스승(明師)을 식별하고 正道邪道를 분별할 수 있게 되며 능히 천하에서 희유한 일을 행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세상에 이런 희귀한 大事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니 부질없이 세월만 보내고 일생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大淸 가경 삼년 戊午年 99일 오원자 유일명이 自在窩中에서 하노라.

 

1第一要 감파세사 勘破世事

오호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이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나니 백년 세월이 순식간일 뿐이니 무상하기 짝이 없다.

비록 금광과 銀山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팔아서 性命을 살 수는 없을 것이며 효자 현손이 있다 하나 질병과 걱정을 덜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서둘러 수련하여 닦지 않는다면 임종할 때에 손은 바쁘고 발은 어지러워 허둥댐을 면할 수 없다.

염왕과 노자는 에 머물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한없는 세월을 다시 태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에 뜻을 둔 자 모름지기 입을 굳게 다물고 급히 수련하여야 바야흐로 큰길로 통함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즉 티끌 같은 세상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망령되이 도를 이루는 환상을 갖게 되니 비록 몸은 이미 출가하였으되 마음은 아직도 出家하지 못한 것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이 세상에 있을 때의 공부와 다름이 없고 한번 행하고 그침이 모두 人情을 따라서 움직이므로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도를 듣지도 못하게 되니 어찌 출가를 귀하다 할 것인가?

예로부터 무수한 학인들이 모두 이와 같이 답습하니 도를 배우는 자는 소의 털과 같이 많으나 도를 이루는 자는 기린의 뿔과 같이 적다.

오진편에 이르기를 금을 쌓기를 산같이 하였더라도 때맞춰 장사꾼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였고 了道歌에 이르기를 먼저 세상일을 가지고 가지런히 하고 초탈한 후에 道理를 잡고 세밀히 정을 연마하였으니 이 말은 세상일은 모두 거짓이고 性命이 최고로 진실하다는 뜻이다. 그 참됨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 거짓됨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한번 그 거짓된 것을 인식하게 되면 마음이 거짓 현상을 따르게 되어 모든 것이 거짓 되게 일어나게 되니 와는 날로 거리가 멀어진다.

이에 스스로 성명을 아끼는 사람이 되지 못하여 허망한 것에 매달려 실답지 못하니 허송세월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옛날에 여조께서는 한번 꿈으로 인하여 모든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며 마조는 죽음을 깨달음으로써 도를 이룸이 가장 빠르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먼저 세상의 일을 감파(勘破)한 후에 도를 닦음이 일반인들의 修眞보다 더욱 쉽고 빠르다 할 수 있겠다.

하물며 出家修行은 세상일을 감파한 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루는 것인데 만약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고 억지로 출가한다면 有名無實하여 하늘에 오르고자 한 것이 오히려 땅에 떨어진 셈이 되어 결국 모든 것을 패망케 되니 어찌 그릇되게 심기만 허비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學人에게 바라는 것은 在家出家를 논하지 말고 진실로 우리에게 간절한 大事가 무엇인가를 분별하려면 먼저 세상일을 겪고 깊이 탐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일 저 일을 탐구하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이 허망함을 알게 되어 세상일에 탐착을 끊게 된다.

성명의 일은 진실로 큰 것이니 이를 따라 몸을 추스리고 바깥의 허망한 일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며 실지를 몸소 밟고 스승을 찾고 도우를 방문하여 용맹전진하여 도를 위하여 몸을 잊는다면 자연 한결 같은 정성이 하늘에 통하게 되리니 조사가 暗中에서 이끌고 진인의 인도함이 있게 될 것이다.

 

2第二要 적덕수행 積德修行

오진편에 이르기를 만약 수행에 陰德을 쌓음이 없다면 함에 여러 마구니들의 훼방이 있게 되니 가히 수행함에 덕을 쌓음이 修道者의 중요한 일이 됨을 알아야 한다.

만일 덕을 떠나서 따로 를 말한다면 이는 이단의 사설이나 방문 외도가 되는 것이니 실제와는 차이가 많다. 그러므로 옛 성인들은 반드시 먼저 를 밝히었고 옛 현인들은 반드시 먼저 덕을 쌓았다.

도를 밝히지 아니하고도 능히 성인을 이룬 사람은 있지 아니하며 덕을 쌓지 아니하고도 능히 현인이 된 자도 없었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현인이 되어야 하고 도를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덕을 쌓아야 한다.

따라서 도와 덕을 함께 하고 내외가 고르게 되어야 성현의 학업을 얻게 되리라.

도는 나를 위한 일이며 덕은 남을 위하는 일이다.

비록 도를 닦음은 끝이 있을지라도 덕을 쌓음에는 끝이 없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 , , 께서 도를 이루신 후에도 오히려 반드시 화광동진(和光同塵)하고 적공누행(積功累行)하여 三千功이 가득 차고 八百行이 완전해지기를 기다려 바야흐로 하늘의 조칙을 받는 것이다.

하물며 金丹大道는 귀신이 꺼리는 것이어서 大忠大孝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알 수가 없고 大賢大德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함부로 전하여서도 아니 된다. 억지로 전하여 노출시키는 것은 귀신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암중에 재앙을 내리고 그 수명을 단축시키니 한갓 이익 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

내가 감곡 노인의 선법을 얻고 大公으로서의 뜻을 품고 매양 뜻있는 사람을 보면 문득 이끌어주고 싶어 혹 물어보거나 간략히 한 자락을 보여주었다.

후에 그들을 살펴보니 자만자족하여 능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게을러져 뜻과 기를 다 잃고 탐내고 번뇌함이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더 심하였다.

앞뒤의 몇 사람이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아, 슬프다!

이러한 무리는 반드시 선조의 덕이 없고 스스로의 마저 쌓음이 없어 처음에는 부지런하나 나중에는 게을러 眞宗을 만회하지 못함이니라.

내가 조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실언하여 사람들을 그릇되게 하였으니 또한 여러 차례 마장을 만났으나 크게 얽혀 들지 않아서 보배로움을 잃지 않은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그 후부터는 입을 굳게 닫고 함부로 법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자질과 덕을 갖춘 자를 기다려 법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의 學人들은 門戶에 들기만 하면 곧 신선이 쉽게 되는 줄로 생각하여 동네방네 다 속이고 다니면서 삼갈 줄을 알지 못한다.

또한 한 올의 실과 한 톨의 쌀이 모두 온 세상 사람들의 피와 땀이며 한번 마시고 한번 먹는 것이 모두 중생의 수고로움이란 것을 생각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口頭禪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혹은 거짓 도법으로 사람들의 재물을 모으며 혹은 黃白術로써 속임수를 쓰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계교를 꾸미니 책으로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후일 이러한 거짓이 쌓여 가득 차게 되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두 뿔이 혹은 있다 하고 혹은 없다 하며 그 끝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달라진다 하니 이러한 무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모름지기 이 도에 뜻을 둔 자는 반드시 덕행을 중히 여기고 스스로 節操를 세워서 진흙탕 같은 곳에서 조그만 이익을 얻고자 다투는 것으로 앞길을 망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이라 하는가?

노인과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제하고 고아와 과부를 가엾게 여겨 약과 차를 대접하며 다리와 길을 보수하고 위태롭고 곤경에 처한 이를 도우며 의리를 중히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어 널리 방편을 행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이라 하는가?

자신이 힘들더라도 남을 이익이 되게 하며 세상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덕을 베풀되 갚음을 바라지 아니하고 원망이 있으되 원수를 맺지 아니하며 공이 있으되 자랑하지 아니하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옳음을 보면 반드시 하는 것이다.

능히 덕을 쌓고 행실을 세워 오래도록 힘을 다하면 마침내 귀신이 덕에 복종하며 품성이 세속을 초탈하여 당당하게 될 것이니 高人이 한번 봄에 곧바로 점찍어 제자로 삼을 것이니 大道를 가히 바라볼 만하다.

그렇지 아니한즉 한 가지 덕과 행실도 쌓지 아니하고 망령되이 도를 이룰 것을 상상하다가 우연히 高人을 만나게 되면 그 착하지 못함을 숨기고 착한 체 하며 스스로 고인을 속였다 자랑하니 이는 남이 자신을 보기를 간과 폐를 환히 꿰뚫듯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 다른 본분에 힘쓰지 않는 무리가 있으니 온갖 천박한 일을 다 행하니 아침에는 술집이요, 저녁에는 기생집이라. 입으로는 도덕을 말하나 속마음은 도적이다. 남에게 손해를 입히더라도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에 천 가지 기이함과 백가지 괴이한 일을 다 꾸미고도 스스로 뉘우칠 줄을 알지 못한다. 이에 끝내는 자신을 원망하게 되어 복과 록이 다 없어진다.

단경을 훼손하고 다 미친 말이라 비방하니 참으로 지옥의 種子.

이러한 사람들은 이단의 무리에 입문하여 사람이 되기를 구하나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감히 신선을 바랄 수 있겠는가?

오호라, 덕은 자기가 세상을 사는 일이요, 도는 스승이 전하여 신선을 이루는 일이니 덕을 쌓지 못하고서 도를 닦고자 한다면 사람의 일도 능히 이루지 못함인데 선도를 어찌 이룰 것인가?

재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3第三要 진심궁리 盡心窮理

說卦傳에 말하기를 窮理盡性 以至於命(이치를 궁구하여 성을 다함으로써 명에 이른다)라 하였으니 가히 盡性至命이 모두 이치를 궁구하여 옳고 그름을 함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치를 궁구함이 투철한즉 성을 능히 온전히 할 수 있으며(性能全) 명을 능히 보전하게 되어(命能保) 곧바로 위없는 참되고 완전한 곳에 들게 된다.

이치를 궁구함이 어지러운즉 명을 닦기 어렵고 성 또한 마치기 어렵게 되어 마침내는 늙음에 이르러 空亡에 떨어지는 후회를 하게 된다.

오늘날 학인들이 한때의 기분에 따라 출가하고 흐리멍텅하게 도를 공부하여 수행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살아있을 때 이처럼 불분명하니 죽을 때에 어찌 밝고 맑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명이 얼마만한 일이건대 이처럼 망령되이 행하는가?

金丹는 천지를 감싸는 도이며 천지의 조화를 움켜쥐는 도이다.

지극히 높고 귀하며 지극히 신비롭고도 묘한 것이니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인들이 자기의 性命이 어떤 물건인지도 생각지 아니하고 조사의 法言이 어떤 뜻인지도 분변치 못하고 종일토록 먹고 마시며 마음을 쓰지 않다가 망령되이 한마디, 반 구절의 묘함이 떠오르면 곧 깨치고 도를 이루었다 한다.

낮에는 허랑방탕하고 밤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깊이 잠들며 단경(丹經)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하고 子書는 허풍이 심하다고 매도한다.

그러고서는 자신에게 도가 있다고 사칭하고 자신의 어긋남으로써 남도 어긋나게 이끌고 망령되이 자신이 진법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장님이 장님을 이끌게 되니 혹 한둘, 信心 있는 修士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말을 달리며 흘깃 꽃을 봄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깊이 마음을 쓰고 실다운 이치를 궁구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른 말이 있느니 "만약 誌面 위에서 참된 뜻을 찾는다면 이는 모두 大羅神仙의 말이라" 하였으니 이는 특히 스승을 구하지 못하고 분발하는 자들을 위한 말이며 단경과 자서가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다.

후인들이 옛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 구절을 구실로 경서를 돌보지 않으니 크게 어긋난 일이다.

무릇 仙眞法言은 한 글자 한 뜻이라도 감히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한 구절마다 모두 한 뜻이 감추어져 있다. 다만 다소의 노파심으로 후인을 위하여 계단을 만들고 교문을 세워 놓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헐뜯고 비방하니 그 죄를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으랴?

뒤의 高人과 현인들이 행하는 바를 보면 모두 古人들이 말한 범주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옛사람들이 후세의 사람들을 잘못되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뜻있는 선비에게 권하노니 古人法言을 취하여 세밀히 궁구하라. 만일 그 가운데에서 스승의 한 妙結을 얻어 앞뒤를 다 통달하여 일점의 의혹이 없이 한다면 능히 그것을 얻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총명함만을 믿고서 마치 자신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지 말 것이며 삿된 소리를 듣고서 함부로 남에게 가서 자신을 그르치지 말라.

문자에 통하지 못한 학인이라도 일상생활 속에 상용되는 말들을 깊이 변별한다면 그 속에 大道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을 살펴보면 체면을 잊는다, 사람의 형상이 없어진다, 도를 궁구한다, 자재함을 좋아한다, 세 번 구르고 네 번 엎어진다, 방정함을 따라 원만함으로 나아간다, 기틀을 따라 변화에 응한다, 모래 속에서 금을 일어낸다, 가운데에서 한다, 일곱 번 죽고 여덟 번 산다, 나만 있고 남은 없다, 죽고 사는 것을 알지 못한다, 性命을 보지() 못한다, 三家를 두루 달리는 것이 一家를 지킴만 못하다, 남에게 겸손하면 반드시 얻음이 있다, 다만 그 하나만을 알고 둘을 알지 못한다.

이상의 말들은 천기가 크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니 어찌 한두 가지 일을 쓸데없다고 버릴 수 있겠는가?

깨달음의 실마리로 삼아서 아침저녁으로 생각한다면 큰 이치에는 밝지 못할지라도 지식이 점점 열려 도와 서로 가깝게 될 것이니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궁구하여 배워나가는 것은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논하지 않고 사람마다 지어가는 것이니 능히 공부를 거르지 않고 오래도록 해나간다면 스스로 깨달음이 있게 된다. 다만 그 깨달음이란 것이 그 개인의 私見이므로 함부로 下手하여서는 안 된다.

진실로 밝은 스승을 만나 반드시 시작과 마침을 철저히 하고 그 가닥 가닥을 명백히 추구하여 진실로 확연히 보는 것처럼 알아서 마음으로 얻고 적절히 下手하여야 바야흐로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앞만 알고 뒤는 모르거나 뒤만 알고 앞을 모르며, 만 알고 을 알지 못하거나 양만 알고 음을 모르며, 만 알고 을 모르거나 용만 알고 체를 모르며, 有爲만 알고 無爲를 모르거나 무위만 알고 유위를 모르며, 元關은 보되 이 생기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약이 생김은 알되 늙고 어린 것을 분별하지 못하며, 혹 단을 맺는 것은 보되 단의 복식을 모르거나, 혹 태를 맺음은 알되 脫胎를 알지 못하며, 文息으로 삶고 찌는 것은 알되 武息으로 단련함은 모르며, 혹 무식으로 단련함은 알되 文息으로 삶는 것은 알지 못하며, 陽火는 알되 陰符는 모르며, 眞火는 알되 止足을 모르며, 溫養은 알되 추첨抽添은 모른다면 털끝만한 오차로 인하여 千里나 잃게 될 것이다. 참됨을 이루지 못함이 이것뿐만이 아니다. 음과 양에는 內外가 있고 오행에도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다.

성명의 공부는 兩段이니 先後二天이 각기 다르다.

참됨이 있고 거짓됨이 있으니 참된 가운데 거짓도 있고 거짓된 가운데 참됨도 있다. 또한 참된 가운데 참됨이 있고 거짓된 가운데 거짓도 있다.

이러한 등등을 꿰뚫지 못하면 닦아 행하여도 도달하지 못한다. 또한 밝게 분변하지 못하면 지어도 이루지 못한다(修之不成 作不成之).

이로써 여조께서도 세 차례에 걸쳐 환단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후에 최공의 입약경을 얻어서 비로소 공을 이루었다. 자청 또한 야밤에 풍뢰의 근심이 있다가 거듭 닦아서 드디어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신선 가운데에서도 우두머리에 해당하지만 이렇게 밝지 못함이 있으면 오히려 뜻밖의 재난을 당함이 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학인들은 마땅히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4第四要 방구진사 訪求眞師

古仙이 이르기를 만약 스승이 사람을 가르쳐 알맞게 일러줌이 없다면 天上의 신선이라 할지라도 머무를 곳이 없다 하였고 또 오진편에 이르기를 그대의 총명과 지혜가 두터워 안자와 민자건을 뛰어넘는다 할지라도 참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정성이로다.

성명의 마음이여! 반드시 스승의 전수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망령되이 사사로운 견해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설도광은 돈오원통頓悟圓通이 스스로 노력하여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후에 향림을 만나 진전을 얻고서야 비로소 대도를 이룰 수 있었다.

상양자도 이미 녹독綠督의 비결을 얻었으나 만족치 아니하고 청성靑城을 본 후에야 화후火候를 갖추었다. 장삼봉도 숭산에서 10년을 고련했으나 한 가지도 얻음이 없다가 후에 정, 여 두 선인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소 大事를 알게 되었다.

비록 세간의 작고 얄팍한 기예라도 오히려 스승의 전수함에 힘입거늘 하물며 성명性命大事를 어찌 스승의 가르침 없이 깨닫겠는가?

대개 性命의 도는 음양을 훔치고 천지의 조화를 빼앗았으며 생사를 운전하고 기틀을 조정하여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는 도이다. 이 도는 귀신도 능히 헤아릴 수 없으며 시초蓍草나 거북이로도 능히 점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얻는 자 성인의 반열에 서는 것이요, 곧바로 피안彼岸에 오르는 것이니 이는 천하제일의 큰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천하제일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실로 聖師께서 귀에 대고 속삭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유독 外道訪問이 삼천 육백 가지나 되며 丹法 또한 칠십이품이나 되니 오히려 邪惡한 것이 바름을 해치고 가짜가 진실을 어지럽히니 누가 눈먼 스승이고 누가 밝은 스승인지 심히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이를 판별하는 것 또한 어렵지만은 않으니 무릇 高人이 세상에 나옴에 스스로 이 범상치 아니하며 홀로 현을 타며 여러 사람과 두루 사귀지 아니하며 세상에 아첨하지 아니하고 무리를 만들지 아니하며 명예를 탐하거나 바르지 못한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며 이익을 꾀하여 사람을 속이거나 괴이한 짓을 하지 아니한다.

한마디 말이라도 세상의 도리에 이익이 되게 하며 한 번 행하고 한 번 그치는 것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에 도움이 되게 하니 탐, , , 가 모두 없고 뜻이 나를 굳세게 하여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인품과 절조節操가 맑고 높아서 사람들이 능히 미치지 못하고 가슴이 열려 거리낄 것 없음을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다.

또한 간혹 뜻있는 사람을 이끌 때에는 그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천 번 갈고 백 번 꺾이게 하여 백옥에 하나의 티끌도 없이 한 연후에야 즐거이 그 처음과 끝을 가르쳐 주며 법을 전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천기를 경솔히 누설하지 아니한다.

이상 열거한 것이 밝은 스승의 모습들이다.

눈 먼 스승의 경우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무언가 갖고 있는 듯이 하며 속이 비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듯이 한다. 자신이 어긋난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며 다시 어긋난 길로 사람을 가르친다.

혹 남녀로써 음양을 삼고 경락의 기 덩어리로 서미현주를 삼으며 혹 화톳불로써 외단을 삼고 心腎을 단련함으로써 내단이라 하고 혹 어떤 상을 잡고서 응신이라 하고 子午를 행함으로써 추첨抽添을 한다 하며 록노를 굴리면서 周天한다 하며 완공을 깨닫고서 無爲라 하고 運氣有爲라 한다.

혹 모양을 잊음으로써 고요를 닦는다 하며 몸을 움직여 (머리) 기를 내림으로써 退陰符를 행한다 하고 혹 유황을 복용함으로써 進陽火를 한다 하며 오곡을 피함으로써 장수한다고들 한다. 이 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공덕을 말할 수 없고 절개와 지조도 없다.

몸에 납의(검은 승복)를 걸치고도 허리 속에는 돈주머니를 차며 머리에는 의젓하게 잠관簪官을 썼으되 마음속은 사갈蛇蝎과 같다. 부귀한 것을 보면 마음을 머물되 어렵고 곤란한 때를 당하면 도를 팽개친다.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으면서도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아니하며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다만 돈 있는 곳을 향하여 공부를 쓰고 거동하는 곳 또한 의식衣食을 헤아려 마음을 쓴다. 인사하는 사람마다 모두 거두어 무리를 삼고 한번 차를 마시고 음식을 대접받음에도 도를 전한다.

이는 모두 성현의 문호를 빌려 스스로와 세상을 속임이며 仙佛法言을 훔쳐서 요사하고 괴이함을 짓는 것이니 이는 다만 스스로의 등 따시고 배부른 것만 생각함일 것이며 어찌 다른 사람들의 死活에 관심이 있다 할 것인가?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그 사람의 말만을 듣고 그의 행실을 살피지 않는다면 비록 도에 목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늘의 그물에 들어 성명을 상해傷害 받지 않는 자가 없다. 한번 그들의 말에 현혹되면 가짜를 참된 것으로 알게 되어 고착되어 바꾸기가 어려우니 비록 고진성사高眞聖師가 이끌고자 하나 뾰족한 방법이 없게 된다. 천하의 도인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 한번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치황(緇黃:중은 검은 옷을 입고 도사는 황관을 쓰는데서 유래)의 무리들이 동서를 달리며 근원도 없는 수많은 공안과 화후로써 사람을 현혹시키니 이들은 다만 구두삼매口頭三昧로써 사람을 취하여 사람마다 이에 부처요, 신선이다.

시험 삼아 도를 묻는 자 천만이나 되나 도를 이루는 자 그 몇이나 있던가? 대저 성현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仙佛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런 희유함으로 인하여 高人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고인은 일반적인 부류에서 벗어난 것인데 어찌 구두삼매로써 고인이 되겠는가?

당년에 나의 스승께서 몰래 시금석試金石을 주어 사람의 높고 낮은 성품을 가늠한 적이 있었으니 만약 여러 수사修士들이 주색재기酒色財氣의 시험을 만나 능히 흔들리지 않는 자라면 범상한 품성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오진편이나 참동계에서 말하는 구결口訣에 상응하는 자는 곧 명사明師이니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5第五要 연기축기 煉己築基

심원춘이 이르기를 칠반환단七返還丹은 사람이 하는 것이나 먼저 반드시 련기煉己를 하여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고 오진편에 이르기를 만약 구전환단을 닦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반드시 연기하여 마음의 체를 잡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대개 수진修眞는 환단이 가장 쉽고 연기가 지극히 어렵다. 만일 연기하지 아니하고 환단부터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환단이란 집의 기둥과 같고 연기란 집의 터를 다지는 것과 같다. 집의 터를 다지지 아니하고 대들보와 기둥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

일찍이 연기를 아니 하고도 환단을 맺은 자는 없었다. 배우는 자 스승의 구결을 얻거든 급히 연기하라. 연기가 순수해져 화로가 마련되면 좌우의 근원이 서로 만나 마음을 얻어 응수하게 되는 것이니 련과 홍이 서로 엉기고 정과 성이 서로 합하게 되면 이때부터는 얻고 나서 다시 잃어버리는 걱정이 없게 된다.

특히 사람이 출생한 후로 양이 다하여 음이 생기고 선천이 다하여 후천으로 용사用事하게 된다.

현재 내가 쓰는 오래된 물건들이 모두 본래 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도 백가지 근심을 그 마음에 더하고 만 가지 일로 그 몸을 수고롭게 하여 이 새고 이 어두워지며 를 패퇴시키니 이 환신幻身을 깨진 항아리나 이지러진 솥과 같이 하니 깨진 항아리로 어찌 물을 담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신체가 쇠패하면 단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니 모두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비록 후천의 거짓된 물질이라고는 하나 환단의 약재가 아니겠는가?

환단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이것의 도움을 받아 공을 이루는 것이니 또한 이 몸을 손상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선천의 진종眞種이 없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후천이 넉넉하지 못함을 두려워하라고 했으니 대개 후천이 넉넉하면 선천을 회복할 수 있고 선천을 회복한즉 후천을 기화氣化시킬 수 있으니 련기煉氣와 축기築氣의 공을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무엇을 煉氣라 하는가?

탐애貪愛를 줄이고 음정陰精을 굳게 가두고 잠을 쫓고 나를 수고롭게 하여 남에게 이로움을 주며 세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 겸손의 미덕을 쌓고 세상일에 물들지 아니하고 용맹정진하여 로써 머물고 옛 선인들의 수도하던 곳을 찾아 그 뜻을 새기고 부귀富貴하여도 음란淫亂하지 아니하며 가난하여도 뜻을 굽히거나 옮기지 아니하고 무력武力에도 굴복하지 아니하며 거친 베옷 속에 을 품은 듯이 큰 지혜智慧는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큰 재주는 졸렬拙劣한 것 같음이 또한 연기이다.

연기의 공이 수없이 많으나 모두 無己-無我에로 귀착되는 것이다.

노자가 이르기를 나에게 큰 근심이 있으니 이는 나에게 有身이 있는 것이다. 내가 無身이라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연기하여 無己에 도달하였다면 그 몸을 바깥 하여도 몸이 보존되고 후천이 온당하여 바탕이 견고하여지니 후천의 진양이 래복來復하고 혼돈混沌한 것 같으나 一如하다.

선천기와 후천기를 얻은 자, 마치 취한 것 같으나 일시진 내에 을 이루게 된다.

만약 연기하지 않은 채 을 운행한다면 후천이 견고하지 못하여 비록 선천이 지척咫尺에 이르러도 맞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니 대개 ()이 이르렀으나 水銀이 맞지 못함이며 ()이 왔으나 ()가 받아주지 못함이 되는 것이다. 저가 왔음에도 내가 대접치 못하는 것이니 슬프다, 축기할 때에는 반드시 탁약(호흡)을 사용해야 하며 연기 시에는 眞煉을 필요로 하니 연기와 축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6第六要 화합음양 和合陰陽

修眞金丹이다. 금단의 도는 造化의 도이다. 조화의 도는 음양의 도이다. 에 말하기를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도라 이른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지가 인온(氤氳:만물을 생성하는 기운이 왕성한 모양)하여 만물이 화순하고(자연의 생육) 남녀가 정을 이끌어 만물을 化生하니 짝 없는 음으로서는 할 수 없고 홀로된 양은 기르지() 못한다. 음과 양이 서로 합하여야 만이 능히 낳고 기를 수 있다.

金丹의 도는 오직 선천의 진일한 기운을 채취하는 것이다. 선천의 無形無象이어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한다.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지극히 허무한 가운데 저절로 오는 것이다.

성인은 다운 것이나 모양은 하고 참으로 있는 것이나 모양은 인 것을 쓴다. 이 실다운 것과 참으로 있는 것은 바로 眞陰眞陽이다. 라는 것은 二八初弦의 기이다(진음진양의 처음 싹트는 기운, 즉 처음 피어나오는 선천진일지기, 즉 감天生一과 리天生七이요, 坎中地生六, 離中地生二이 또한 이다). 이 기운은 음양의 교감이 아니면 능히 을 나타낼 수 없다.

만약 금단의 대도를 닦고자 한다면 이 음과 양을 터전삼지 않고는 달리 어떤 술책이 없다. 다만 음양이 한 가지가 아니어서 진실로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알아야 하니 잘못하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할뿐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게 되니 밝게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남녀의 음양은 탁한 세상의 음양이며, 신장과 심장의 음양은 환신幻身의 음양이다. 해와 달은 천지의 음양이며 동지와 하지는 일년의 음양이다. 초하루와 보름은 한달의 음양이고 자시와 오시는 하루의 음양이며 二候四候(陽生一候 藥生一候 合而二候 마음이 죽으면 이 되살아나고 몸이 하면 기가 일어난다. 달마는 二候에 모니를 캐고 四候別神功한다고 했음) 한때의 음양이다.

무릇 이 모두는 금단의 음양이 아닌 것이니 금단의 음양은 我家로써 음을 삼고 他家로써 양을 삼으며 나는 이가 되고 는 감이 되어 가운데 一陰眞陰이 되고 감중의 일양이 진양이 된다.

이것은 으로써 를 메우는 것이니 이는 진음이 진양을 하는 것이며 진양으로써 진음을 건지는 것이다. 이 음양은 또한 內外의 다름이 있다. 의 음양은 順行의 음양으로써 生身 이후의 일이며 후천이요, 人道이다. 의 음양은 逆運의 음양이며 生身 이전의 일로써 선천이며 仙道이다.

내외의 음양은 모두 남녀의 이 없으며 非色非空이요, 卽色卽空이다.

도 아니고 도 아니면서 卽有卽無이다. 만약 색이나 공, 유와 무의 형상에 집착한다면 이는 진음, 진양의 실다운 자취가 아니다. 이미 음양을 알았다면 다음은 조화가 중요하다.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도록 하고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도 않아야 하며 너무 빠르거나 늦지도 말아야 하며 도 아니고 도 아니며 너무 밀착하거나 떠나 있지도 않으며 너무 서두르거나 게으르지도 않아야 한다.

혹 양이 움직이면 음이 따르고 음이 느껴지면 양이 응한다. 혹 음 중의 양을 쓰며 양 중의 음을 쓴다. 혹 음을 빌려 양을 온전히 하고 양을 써서 음을 제어하기도 한다. 혹 속의 음양으로써 바깥을 돕고 혹 바깥의 음양으로써 안을 건진다. 따라서 모두 內外合道해야 한다.

금단은 허무한 가운데 맺어지는 것으로 채취한 후에 복식하여 장생불사 한다.

참동계에 이르기를 같은 종류는 교묘함을 베풀기가 쉬우나 다른 종류끼리는 교묘하기가 어렵다 하였고 오진편에 이르기를 내약을 돌이키면 외약과 같은 것이니 가 통하면 도 또한 반드시 통한다 하였다.

丹頭가 서로 화합하면 가 서로 같아지니 온양은 두 가지 작용이 있다.

삼봉조사 말하기를 세간의 음양은 남녀가 서로 짝을 이루어 子孫을 낳아 대대로 전하여지는 것이니 하여 범인이 되고 하여 이 되는 것은 다만 中間에서 전도함에 달려 있으니 음양을 조화하는 도가 모두 여기에 있다.

 

7第七要 심명대후 審明大候

옛 경서에 이르기를 "성인께서 약은 전하였으나 는 전하지 않아서 화후를 아는 사람이 적다" 한즉 이는 약은 쉬우나 화후는 가장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대개 약물이 비록 찾기가 어렵다고는 하나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 지점하여 환히 밝게 보이게 하여 참으로 알게 해준다면 현재 있는 것을 취하고 다른 곳에서 구함을 바라지 않게 되니 이것이 곧 쉽게 알 수 있는 까닭이다.

화후에 이르러서는 문팽(文烹-삶다)이 있고 무련(武煉) 下手가 있고 휴갈休歇이 있으며 내외가 있고 時刻이 있고 爻銖(효수)가 있으며 빠르고 늦음이 있고 止足이 있으며 一步에는 一步의 화후가 있고 步步에는 步步의 화후가 있어 변화가 다난하므로 수시로 적절히 행하여야 하니 바야흐로 그때그때의 법도가 있다. 만약 털끝만치의 차이가 벌어진다면 문득 천리나 잃게 될 것이니 무릇 五行을 모우고 四相을 화합한다는 것은 천지의 生機를 훔치고 음양의 祖氣를 훔치는 것이다.

두병을 돌리고 천강을 굴리며(眞意眞氣를 말하나 천강을 잡고 두병을 돌린다 함은 소주천의 로 약을 달이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 진정한 소주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곤문坤門을 열고 간호艮戶를 막으니 그 묘함이 적음積陰의 아래에서 일양이 來復하는 때에 있다.

이 때라는 것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고 四時와 더불어 그 차서를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하는 것이니 이른바 일 년에 다만 一月이 있고 일월에 다만 하루가 있고 하루에 다만 한 가 있으니 이 一時는 참으로 놓치기는 쉽고 찾기는 어려우며 어긋나기는 쉽고 만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를 얻은즉 生道에 들 수 있고 잃은즉 死道에 들게 된다.

성인은 이 一時陰符陽火를 움직여 天根을 뽑고(만물의 근본이며 우리의 육신을 생하는 원천이다. 中爻 陽精을 얻으니 곧 이 된다. 이로 인하여 眞陽이 발생하니 天根이라 한다) 월굴月窟을 뚫으며(活午時를 말한다. 진양화眞陽火가 정문頂門에 올라 一陰이 생하기를 기다리니 그 상이 을 기다림이며 월굴이라 한다) 혼돈混沌을 파하고 (이 서로 교합할 때에 天地人我가 모두 아득하여 그 어떠한 것도 분명함이 없는 상태) 서주를 딴다.

칠십 이후를 돌리고 이십사절기의 正氣를 빼앗으니 水火(연홍의 體 火속에 들어가면 眞意로써 成丹한다) 상제相濟함이 여기에 있고 금목교병金木交倂(팔만 사천 모공이 활짝 열리는 것은 하는 것이요, 모든 것이 부드러워져 없는 것 같음은 하는 것이다. 이때에 으로 돌아간다)이 여기에 있다.

연홍상투鉛汞相投(연은 본래 火體이며 금정金情이고, 은 본래 水體이며 본성本性이다. 이 두 가지는 先天이다. 이 두 가지를 솥 안에 넣고 달이면 을 이룬다)가 여기에 있고 安身立命이 여기에 있으며 出死入生이 여기에 있다.

만약 이때를 잃으면 음양은 분리되고 참된 것은 숨게 되고 가짜가 일을 주관하게 되니 이미 후천에 떨어져 억지로 쓸 수가 없다.

曲江의 언덕에 이르러 달이 밝다 함은 약을 하는 화후이며 소식이 오는 때에 근본을 구한다 함은 약을 캐는 화후이다.

함이 바르고 참되니 만약 을 기다린다면 더 나아갈 수 없다 함은 약이 어리고 늙음의 화후이고 를 만날 때에 급히 캐고 이 가득하면 도리어 감당할 수 없다함은 빠르고 늦음의 화후이다. 홀연히 나타난 이 단전에 있음을 보면 급히 맹렬히 단련하여 찌고 삶아야 한다. 다만 호랑이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굴에 들어가는 것을 들으면 마땅히 전도하여서 거꾸로 베풀어야 하는 것이니 武式의 화후를 써야 한다.

화로에 불을 지펴 약을 달이고 있을 때에는 을 편안히 하고 숨을 고르게 하여 天然스럽게 하여야 하니 이는 의 화후를 쓴다.

아직 환단하지 못하여 급히 단련하며 또 단련을 마치고 止足을 아는 것은 온양溫養의 화후이며 다만 화력을 조화롭게 한 후에 眞種子를 얻어 황아(을 단련하여 이루는  , 이란 中黃이며 는 생기生機의 싹으로 대약이 처음 나타나는 모습을 연유한 이름이다)를 점차 자라게 하는 것은 단을 이루는 화후이다.

마음을 자연함에 맡기고 삼가 조심하여 지키며 화로의 화후를 지켜보는 것은 단을 보전하는 화후이다. 大丹의 화후는 별도의 묘용이 있으니 함을 받아들이고 이룬 후의 위험을 방지하는 것은 태를 맺는 화후이며 혼돈 七日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며 도반道伴을 의지하고 水火를 고르게 함은 고제固濟의 화후이다.

흙 가마에 돌아가 굳게 가두어 봉고封庫하고 구슬의 힘을 보급 받는 것은 태를 기르는 화후이며 납을 쓰되 보통의 납은 쓰지 아니하고 진연眞鉛을 쓰며 쓴 후에는 버린다 함은 추첨의 화후이다.

단조(丹灶)와 하거河車는 지나치지 않게 편안하게 할 것이며 학태구식鶴胎龜息을 면면히 함은 목욕의 화후이다. 하루 12시진 내에 뜻이 이르는 대로 하는 것은 위험을 방지하는 화후이다.

영아嬰兒(옥액환단 시에 그 단이 처음으로 뚜렷한 모양을 이룬다. 無中生有이므로 영아라 한다. * 선학사전에는 위와 같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대약의 씨앗을 진종자라 하고 그 진종자가 피어나오는 것을 黃芽라 하고 황아가 뚜렷이 모습을 이룬 것을 영아라 하며 이 영아가 도태를 이루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가 한결 같이 진기를 머금고 태를 이루어 성인의 기초를 이루는 화후이며 소주천 공부를 마쳤을 때에 처음 나타난다.

물음을 모두 물리치고 단을 성숙시켜 범상한 틀에서 벗어나 만년을 사는 것은 탈태脫胎의 화후이다. 이러한 대단종시大丹終始의 화후에도 문득 내외양용內外兩用의 화후가 있으니 범속凡俗에서 天上의 일을 구하며 12 때에 따라 세간의 재물을 쓴다 함은 약을 캐는 화후 의 화후이다.

"언월로 가운데에서 옥꽃술이 생겨나고 주사의 솥 가운데에 수은이 고르다." 함은 단을 맺는 화후 의 화후이다. 입정 七日에 진양이 다시 머리를 쳐들고 별도의 묘용으로 百神을 혼합한다 함은 를 맺는 화후 의 화후이다.

유무有無가 모두 평립平立하고 물아物我가 모두 귀공歸空함은 태를 벗어나는 화후 의 화후이다.

이에 內外二丹의 화후의 비밀을 모두 밝혔으니 그 가운데 또 더욱 미묘하고 오묘한 것은 으로써 밝혀야 하는 것이니 사람마다 그때그때 알맞게 변통해야 할 것이며 문자로써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第八要 외약료명 外藥了命

오진편에 이르기를 "기교와 거짓을 안 하는 것이 功力이요, 他家를 알아서 하는 것이 죽지 않는 방법이다"라고 하였고 녹록자는 말하기를 先天의 기는 허무한 가운데 온다고 하고 他家라 하고 虛無라 말하니 一身에서 생겨나는 물건이 아닌 줄로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하므로 하늘과 사람이 모두 놀래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써 만물을 化生하고 로써 을 이루니 사람이 하늘이 부여한 正氣를 받아서 만물의 영양이 되고 이 기를 갖춘즉 이 이치를 갖추게 된다.

이며 이다. 이 성명은 天地가 주는 것이니 하늘이 시작에는 주고 끝에는 빼앗는 것이니 이러한 형세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만약 후천 幻身의 물질로써 하늘과 더불어 주권을 다투고자 한다면 이 모두가 조화의 테두리 안에 속해 있는데 어찌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금액환단이 없이 망령되이 성명을 보전할 것을 바라지만 그럴 이치는 만에 하나도 없다.

금액환단은 선천의 도이다. 선천의 도는 天地를 감싸고 음양을 운동시키며 天地 밖의 비밀스러운 기틀을 이음이다.

그러므로 능히 生死를 마치고 윤회를 피하며 범속한 세상에서 벗어나 성인의 기반에 드니 이렇게 유일한 비기秘機가 멀게는 千里나 떨어져 있고 가까이는 지척에 있건만 가히 애석하다. 세상 사람들은 참된 것을 깨닫기를 즐겨하지 않는구나.

날로 멀어지고 날로 성기어져서 끊어지게 하고 돌이킬 줄을 모르니 스스로 성명을 버리고 만다.

만약 뜻있는 수사가 실다운 이치를 궁구하여 홀연히 의심을 깨고 적중함이 있다면 순간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곧바로 피안에 오른다면 빛나고 빛나는 금단을 三年九年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하루에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을 이루기는 최고로 쉬우나 수련修煉하기는 심히 어려우니 허와 실이 상응하고 음양이 변화하는 연명延命가 아니면 금단金丹은 맺어지지 아니한다.

延命는 천지조화의 권세를 빼앗으며 음양 소식의 기틀을 훔치어 생살生殺을 굴리며 북두칠성을 돌리니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못하는 도이다.

음부경에 이르기를 "그 기밀을 훔침이여, 천지가 능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고 하였고 오진에 이르기를 "처음에 유작有作일 때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다가 무위無爲에 이르러서는 대중이 비로소 알고 다만 無爲가 묘한 것만을 보니 어찌 有作이 근본 기반임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사람들이 선천을 잃어버린 후로는 진양이 이지러지게 되어 형체는 비록 남자이나 그 속은 다 이다.

한결같이 자신의 몸을 잡고 수련하나 그 내용은 눈물이나 침 진액이나 精 氣 혈액을 단련할 뿐이며, 안 이 비 설 신 의를 벗어나지 못하며, 칠정七情 육욕六慾 오온 팔식 삼팽三彭 백혈百穴에 지나지 못한다.

이는 음으로써 음을 구제하는 것과 같으니 이 어디로 말미암아 이을 수 있을 것이며 단을 무엇으로 연유하여 맺을 수 있겠는가?

고로 참동계에 이르기를 암탉이 혼자 낳은 알로는 새끼를 온전히 할 수 없다 하였으니 그 증거가 된다.

무릇 丹經의 이른바 外藥이란 것은 아가我家의 진약眞藥이 바깥으로 흩어져 내게 붙지 않고 타기他家에 붙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他字外字를 잘못 해석하여 어녀규단이나 오금팔석, 천지일월, 운하초목 등으로 의심하여 갖가지 형체 있는 물체로 오판하게 되었다.

이는 진정대약眞正大藥이 비색비공非色非空이며 비유비무非有非無이며 홍몽미판의 시기始氣이며 천지미분天地未分의 원인元仁이며 순한 즉 生人, 生物하고 역한즉 성선작불成仙作佛임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성인께서 법으로써 1개 시진 안에 추섭하여 한 알의 서주를 맺으시니 이를 양단陽丹, 환단, 금단, 진연이라 한다.

이 진연으로써 자신의 음홍陰汞을 점화시키니 이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 같이 찰나에 건홍乾汞이 맺어져 성태聖胎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外藥이란 이름이 연유된 까닭이다.

좀 더 세밀히 살펴보자면 약이 서남에서 나오니 이는 곤위坤位이다.

곤위에서 찾고자 한다면 어찌 사람을 떠나서 찾을 것인가 하니 이것이 외약이다. 초사흘에 진이 경방庚方에서 나오며 곡강 언덕 위에 달이 밝다 하니 외약이며 금 솥에 주사, 수은을 머물고자 하며 옥 연못에 물 속 수은을 버리고자 하니 외약이며 감위坎位의 심중실心中實을 취하여 리궁離宮의 속 음을 점화시키는 것이 외약이요, 언월로 속에 옥 꽃들이 생기고 주사 솥 안에 수은이 고르다 함이 외약이요, 坎離의 기운이 화합하면 황아黃芽가 저절로 생긴다 함이 외약이다.

다만 약이 본래 바깥에 잇는 것이라면 어떻게 안에서 생김을 얻을 수 있겠으며 약이 에 속한 것이라면 어떻게 나에게 있음을 얻을 것인가?

경에 이르기를 五行順生하면 法界가 불구덩이요, 오행이 전도되면 天地가 칠보이다 라고 하였으니 은 본래 하나 이제 가 도리어 하며 은 본래 하는 것이나 이제 가 도리어 하니 金木水火 가운데에 戌己 二土가 감추어져서 四象을 화합하고 오행을 배합하니 一氣를 운용하여 다시 一太極을 이룬다.

이 지극해져 한 알의 양한 을 이루니 이를 복용하여 장생불사를 이룬다.

천지와 더불어 을 함께 하고 달과 더불어 그 빛을 다투니 이른바 한 알의 금단을 삼킴으로써 비로소 이 나에게 있음이요, 하늘에 달려 있지 않도다함을 알게 된다.

오호라! 만냥의 황금을 사는 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으면서 十字 거리에서 지극한 사람(至人)은 어찌 그냥 보내는가?

금단의 대도는 만겁에 한번 전하는 것이거늘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한 것이어서 이를 얻는 자는 마침내 성인의 반열에 서고 다음 생이나 후세를 기다리지 않고 눈앞에서 부처의 신통을 얻을 수 있거늘 사람들은 어찌 즐기기만 하고 덕을 쌓고 도를 닦지 않는가?

 

9第九要 내약료성 內藥了性

도덕경에 이르기를 유욕有欲으로써 그 규를 관하고(有欲以觀其竅) 무욕無欲으로써 그 묘를 관한다(無欲以觀其妙)라 하였으니 이 두 마디는 금단 대도의 처음과 끝이 되며 古今 학인들의 요결이다.

외약을 얻지 못한즉 능히 음양을 벗어나지 못하며 내약을 취하지 못한즉 이 다 같이 묘함을 이룰 수 없다.

덕이 높은 사람은 내약을 닦은즉 외양이 온전해지고 下德인 사람은 외약을 닦아서 내약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외약은 점법漸法이며 내약은 돈법頓法이다.

외약은 凡人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내약은 성인에 드는 것이다.

유욕으로 규를 관한다는 것은 외약이며 조화의 공을 훔치는 것이니 환신幻身 의 일이다.

무욕으로 묘를 관한다는 것은 내약이며 명심견성明心見性이며 法身 上의 일이다.

진실로 외약을 이미 얻고도 내약을 닦지 않는다면 여조의 이른바 "수명이 天地와 같으나 한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못한다"에 해당한다.

대단히 얻기 어려운 것은 외약에 있으니 만일 외약을 얻었다면 이는 곧 내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뒤이어 聖胎이 있게 된다. 陰符이 여기에 있다.

참동계에 이르기를 , , , 세 가지 보배를 굳게 닫아 통하게 하지 말라, 진인은 깊은 연못에 잠긴 듯이 하고 부유할 때에는 中道를 지킨다 하니 소위 무욕으로 묘함을 관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무욕으로 묘함을 관한다는 것은 무위의 도이다.

무위라고 하여 고목이나 차가운 재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조둔모몽朝屯暮蒙(조둔은 起火 모몽은 退火로써 음으로 양을 구한다), 추연첨홍하고 위험을 방지하고, 성태를 튼튼히 하는 공을 쌓으니 곧 오행을 융합하고 음양을 화합하여 도와 법을 모두 잊고 유와 무가 하나가 되며 十月出胎身外有身을 이루어 최극점에 도달하여 마침내 진여대각지지眞如大覺之地에 돌아간다.

이는 바로 부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 최상일승의 도이다.

만약 을 마치지 못하고 이 공을 닦는다면 근본이 굳지 못하고 허하여 실답지 못하다. 때문에 화로 속에서 약을 단련함에서부터 큰 조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진여지성眞如之性을 요득了得하려 할 때에는 만약 조그마한 오차라도 발생한다면 이것이 곧 몸에 큰 어려움을 가져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옛 사람들이 性理로써 많은 언어를 세웠으니 과연 열반의 마음을 아는 자 그 몇이며 眞如之性을 보는 자 그 몇이겠는가?

열반심과 진여성은 원광圓光이 크고 넓고 뚜렷하여 天地를 꿰뚫는 것이니 후천 人心血性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고인들도 또한 은 마쳤으나 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만겁토록 음령陰靈으로 떠돌며 성인의 지위에 들지 못한다.

또한 이미 은 마쳤으나 을 마치지 못한 사람도 있어서 사물에 응하여 집착이 있게 되니 이러한 경우에는 비록 幻身을 벗었다고는 하나 法身마저 벗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또한 長生을 하되 無生은 못하며 生身는 능히 마치되 未生之前은 온전히 하지 못한다.

내약료성內藥了性이 최대의 사업이니 어찌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큰 공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면 성을 닦기에 앞서 먼저 을 닦은 사람은 을 마친 후에는 급히 을 닦았으니 음양을 함께 쓰고 성명性命을쌍수雙修함이다.

有爲로부터 무위에 들었으되 有無가 다 없고 드디어 허공을 타파하고 불생불멸의 지경에 드니 마침내 수진修眞의 일을 능히 마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