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횡설수설

인생론 〔 人生論 〕

검은바람현풍 2025. 1. 7. 12:37

 

                                                              太天 安庚洙 2007. 10. .    2010. 2. 23. 7. 10. 교정

 

 

머리 말

본 인생론은 필자가 교단생활을 시작한지 약 15년 될 즈음에 남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나는 학생들에게 무었을 가르쳐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생겨났었는데, 마땅한 답을 얻지 못하다가 그로부터 약 10여년이 경과하면서, 엉뚱한 곳에서 그 해답의 근간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약 10여년이 경과 할 즈음하여 필자의 밥줄이었던 생물학의 생명관과 연계시켜 생각들을 개략적으로 기술하여 보았는데, 그 후 다시 약 3년이 지나, 교단생활을 마무리 하려 하면서 수정 보완 하였다. 다시 교단생활을 마치고 4개월이 지난 후 조용히 재수정 한 것이 본 인생론으로 생명관은 교단활동 내용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배워야 할 것이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로써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살아가는 기술, 또는 방법의 배움이니 수렵시대 같으면 짐승 사냥법이 될 것이요, 현대사회 같으면 직업을 얻기 위한 기능 또는 지식의 습득으로 형이하학적인 생활수단의 배움이다. 그 둘은 기왕 주어진 인생을 좀 더 즐겁게 보람되게 살기 위한 공부이니, 형이상학적인 인생의 목표에 대한 배움이다. 여기에서 무엇이 잘사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되고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가치관이요 인생관이 된다. 따라서 교육관은 가치관과 다를 바 없고, 가치관은 바로 인생관이 된다는 생각에서 인생론이란 제목으로 형이하학적 측면과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몇 자 적어 정리하여 보려 함이며, 혹 이 글을 통하여 인생길의 동지를 만날 수 있을까 염려하기도 하는 바이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꽤나 오래 전부터 웅크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쉬지 않고 숨이 들락거리고, 심장도 콩당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 죽은 것은 아닌 듯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가 하고 보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듯 하기도 하고, 죽어야 할 이유 또한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꽤나 머리가 아프다. 정리 좀 해 보자.

 

 

 

. 형이하학적 고찰

 

(1)

사람은 살어 있을 때 만 사람이지 일단 죽고 나면 사람이라 하지 않고 시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이기 위하여 는 첫째로 죽지 말고 살아 있어야 사람도 된다. 따라서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지 않고 열심히 살려는 원초적 본능을 갖고 있는 것이며 이와 같은 원칙은 모든 생물체 에서도 동일하게 적용 된다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 하나는 생명활동이다.

생물이 살아있기 위하여 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때에만 살아 있을 수 있는데 예로써 심장이 뛰는 일, 숨 쉬는 일, 밥 먹는 일, 변 보는 일, 잠자는 일, 돈 버는 일, 공부하는 일, 등등 무수히 많다. 이와 같은 일들을 하기 위하여 는 우리의 몸에서 여러 기관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각자 자기가 맡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렇게 살아가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들을 생명활동줄여서 생활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람이 시체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기 위하여 는 생명활동을 잘 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잘살기 원칙 1 : 잘 살고 싶은 자, 게으름 피지 말고 부지런 하라.

다음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것이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즉 육체라고 하는 터전이 있어야 한다.

이상의 생명활동과 육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아간다는 생명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생명활동과 영양소

내가 이기 위한 필수적인 생명활동들은 움직이는 이다. 따라서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는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살아가는데 쓰고 있는 에너지는 어떤 것 일까?

내가 살아가는데 써야 할 에너지는, 주는 사람도 없고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오직 나 자신만이 해결하여야 하고, 해결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에너지는 내 몸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그 에너지는 당연히 외부로부터 몸 안으로 들여와야 만이 사용도 가능한 것이다.

이때 생명활동에 직접 쓸 수 있는 에너지 저장 물질을‘ATP’라고 하는데, ATP는 내가 만들어서 쓰고 있다. 즉 생물체는 ADP 라는 그릇에 에너지를 집어넣고 인산이란 물질로 봉해버리면 ATP가 만들어 진다. 이때 ADP에 저장할 에너지를 공급해 줄 수 있는 물질이 별도로 있는데, 그것이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로써 우리는 이 세 가지 물질들을 3대영양소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생명활동에 필요한 영양소는 그 용도에 따라 에너지원, 몸의 구성성분, 각종 생리작용을 조절해 주는 물질 등이 있는데, 다시 이들을 3대영양소, 5대영양소, 6대영양소로 분류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매일 먹고 있는 음식물 이라는 것은 이러한 영양소들이 많이 들어 있으면서 몸에 해로운 물질들은 적정치 이하로 적게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음식물을 먹는 근본 이유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소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먹어야 하는 본래의 목적은 생각지 않고 다만 입을 넘길 때 혀를 자극하는 입맛만을 가지고 음식을 잘 먹었다 못 먹었다 하고 있으니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잘살기 원칙 2 : 잘 살고 싶은 자, 잘 먹어라. 필요한 것을 먹고 해로운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 음식도, 물도, 공기도...

 

2) 사람의 주요 생명활동

그러면 사람에서 중요한 생명활동에 대하여 대략 살펴본다.

(생물의 종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음)

영양소가 들어있는 음식물을 몸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 있다.

들여 온 음식물은 너무 커서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가 직접 사용할 수 없으므로 세포가 쓸 수 있도록 잘게 잘라야 하는데 이러한 일을 소화라 한다.

소화 흡수한 영양소는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일을 순환작용이라 하고 피와 혈관 심장이 맡고 있다.

세포는 혈액으로부터 받은 영양소를 분해하여 ATP를 만들어야 일도 하고 살 아 가는데 이 일을 호흡이라 하며 보조적으로 폐와 혈액의 도움이 있다.

【 ※ 우리의 선현들은 잘 살 수 있는 호흡법을 후손에 전해 주셨으니 우리민족 2대 경전중 하나인 삼일신고에도 나타나 있고,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화랑도 역시 호흡공부를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호흡법을 익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을 가리켜 선비라 고 불렀다. 이 호흡법을 조식 이라고 하는데 흔히 세간에 잘 못 유통되는 말로 단전호흡 이다

잘살기 원칙 3 : 잘 살고 싶은 자, 숨 잘 쉬어라.

세포가 살아가다 보면 각종 쓰레기 물질이 생기는데 이 불필요한 쓰레기 물질들은 몸 밖으로 버려야 한다. 이러한 일을 배설이라 부르며 신장과 방광 등이 담당하고 있다.

생명활동에는 많은 화학반응이 수반되는데 화학반응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는 알맞은 환경조건이 필요하다. 따라서 생물체는 내부 환경조건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를 항상성이라고 부르며, 주로 자율신경과 호르몬 등에 의하여 조절되어지고 있다.

몸 속 내부 환경을 조절하기 위하여는 먼저 현재의 상태를 파악하여야 하는데 이 일을 담당하는 곳이 감각기관으로 다섯 기관이 있고(五感) 뇌는 판단을 내리는 등 중요하게 관여하고 있다.

몸에 들어와서 생명활동을 방해하여 나를 못살게 하는 것도 있는데 이들을 항원이라 부른다. 항원이 몸에 들어왔을 때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들어온 항원을 제거하는 일이 이루어진다. 이 일을 담당하는 물질을 항체라 부르며 이러한 방어 작용은 주로 혈액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상의 생명활동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으며 다른 일들이 아무리 잘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어느 한 가지 일이 정상궤도를 벗어나게 되면 그 생명체는 더 이상 전체적인 생명활동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3) 생명의 최소 단위 세포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생명체라 하더라도 하나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생명활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물리적 화학적 일들이 요구 된다.

학자들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 구조적 기능적 최소단위 공장을 세포라 부르고 있다 즉 모든 생물체는 세포로 되어 있으며, 원칙적으로 하나하나의 세포들은 모두 독립된 하나하나의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세포에서는 생명활동에 필요한 일들을 모두 다 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일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는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전문공장 구조물들을 갖추고 있는데, 이 세포내 미세구조 공장들을 세포기관이라고 부른다.

세포기관들은 각각의 맡은 생명활동을 수행함과 동시에 상호간 긴밀하게 협력하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전체적으로 통일된 또 다른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생명의 기본단위라고 하는 세포인 것이다 생명의 기본단위가 되는 세포 한 개로 일생을 살아가는 하등한 생물들을 우리는 원생생물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하여 고등하다고 하는 동식물들은 무수히 많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도 하나의 세포로 살아가는 원생생물에서와 같은 체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원생생물에서 세포기관들이 모여 세포를 이루고 이 세포가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다세포로 된 고등한 동식물에서도 세포들이 모여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전문 구조물 인 조직이나 기관을 형성하고 각각 맡은 바 생명활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다시 이 조직이나 기관들은 상호간에 긴밀한 협력으로 또 다른 하나의 공동운명체 인 개체를 이루게 되는데, 이 개체 역시 하나의 독립된 삶을 누리고 있다.

이때 하나의 세포에서 전체적인 조절과 통제의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있는데 이를 세포핵이라고 부르며, 고등한 동물에서도 뇌가 몸체로부터 분리 발달되어 이와 같은 일을 담당하고 있다.

 

4) 생명의 탄생 - 세포분열과 푸렉탈 이론

그러면 생명의 기본단위라고 하는 세포는 어떻게 생겨 난 것일까?

새로운 세포는 전에서부터 있었던 과거의 세포로부터, 세포 만드는 작업을 통하여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 과정을 세포분열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내는 과거의 세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 답 또한 간단하다. 그 세포의 과거세포로부터 만들어 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세포분열의 과정은, 다시 그 세포들의 연합체로 된 라는 한 개체의 탄생과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부터 왔는가라는 좀 어려울 듯 한 의문에도 답은 간단하게 나오게 된다. 새로운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왔을 것이다가 된다.

여기에서 는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생각은 생명의 탄생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었는가라는 좀 어려운 명제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면 한 사람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자. 탄생에 필요한 중요 과정만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 ㉡ ㉢ 의 과정은 세포분열이고, 은 개체 탄생이다 )



과거의 DNA로 부터 새로운 DNA 제작 : DNA복제
과거의 핵으로 부터 새로운 핵의 제작 : 핵분열
과거의 세포로 부터 새로운 세포 제작 : 세포분열
과거의 사람으로 부터 새로운 사람 제작 : 사람 탄생

이 과정을 다시 정리하여 보자.

새로운 DNA 는 과거에 있던 DNA 로부터 복제되어 탄생되고

새로운 핵 은 과거에 있던 핵으로부터 핵분열로 탄생되고

새로운 세포는 과거에 있던 세포로부터 세포분열로 탄생되고

새로운 사람은 과거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발생하여 탄생된다.

우리는 위의 정리에서 DNA , 핵이나, 세포나, 사람이나 그 규모와 내용은 다를지라도 모두 공통적으로 과거의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탄생되고 있는, 즉 동일원칙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묘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동일법칙의 반복 적용론을 서양에서 말하는 푸렉탈 이론으로 생각하여도 크게 잘 못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푸렉탈 이론을 몇 가지 다른 상황에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과거의 세포로부터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 진다면, 현재의 지구도 과거의 어떤 지구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별의 일생 이론). 우리의 은하도 과거의 어떤 은하로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가능 할 것이다. 조금 방향을 바꾸어 보면나의 모든 생각()도 과거의 어떤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을 것이다.”와 같은 생각들도 가능할 것이다.

다시 물체라는 관점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자.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들은 반드시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물체들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렇다.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는 뜻밖에도 자연현상에 대한 중요한 법칙을 찾게 되었다.

즉 자연계에 나타나는 현실이라는 모든 결과는 반드시 과거의 어떤 원인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자연의 진리를 찾은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의 진리를 佛家에서는 연기론(인연 설) 이라고 했으며, 우리의 선현先賢들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팟 심은데 팟 난다’‘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등 등, 많은 교훈의 말씀을 남겨 주셨다.

잘살기 원칙 4 : 잘 살고 싶은 자, 먼저 잘 살 수 있는 원인을 만들어라. 절대 꽁짜로 되는 일은 없나니 쓸데없는 욕심도 버려라.

이와 같이 푸렉탈 이론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폭 넓게 적용시켜 본다면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무수히 많은 사실들의 원인을 추리해 낼 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새로운 사실들의 가능성을 쉽게 찾아 낼 수도 있어서 한 차원 높은 인생의 맛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 나의 시조세포 수정난의 탄생

다시 푸렉탈 이론에 의하여 의 탄생을 생각하여 보자.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라는 사람의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니요, 땅으로부터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며, 반드시 나와 같은 과거의 사람으로부터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이 탄생한 나를 자식 또는 자손이라 부르며, 자손을 만들어 주었던 과거의 사람을 부모 또는 어버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새로운 생명체는 반드시 과거의 생명체로부터 탄생되어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일을 생식 또는 번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나는 무수히 많은 세포들로 이루어 졌다고 하는데 그러면 나를 만들었던 맨 처음의 시조 세포는 무엇이고 어떻게 탄생 된 것일까?

이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로 과거의 사람인 모체의 난소에서 생긴 한 개의 난자와, 또 다른 과거의 사람인 부친의 정소에서 만들어진 정자 한 개가 다시 하나로 합쳐 새롭게 형성 된 수정란 이란 특수세포 이다.

이 수정난이란 시조세포는 무수히 많은 세포분열을 하여 새로운 많은 자식 세포들을 만들어 내고, 새로이 만들어진 자식 세포들은 필요에 따라 다시 새로운 세포를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세포들은 다른 세포들과 함께 분업화하여 왈 조직이나 기관을 이루며, 나아가 이 조직과 기관들이 전체적으로 통합 되여 라는 한 사람을 탄생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산다는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생명체인 세포들의 연함 협력시스템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죽음 또한 일차적으로는 내 몸을 이루는 각각의 생명체들 간에 통합조절 시스템이 끊어져 협력하지 못하고 이차적으로 모든 세포들이 더 이상 생명활동을 할 수 없게 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푸렉탈 이론에 입각하여 한 사람을 하나의 국가로,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을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 생각하여 보자.

한 사람이 잘 살기 위하여는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소 생명체인 세포들이 각각 잘 살아야 하고, 세포들이 잘 살려면 그 세포들의 연합체인 한 사람이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의 경우에도 그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잘 살 때 전체가 되는 국가도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며, 백성 또한 개개인이 잘 살고 싶다면 먼저 국가가 건전하게 잘 유지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나온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국가관을 찾을 수도 있고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도 똑바로 알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홍익인간의 이념, 불우이웃 돕기 등의 중요성과 올바른 의의에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니, 이로써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바르게 사는 길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잘살기 원칙 5 : 잘 살고 싶은 자, 먼저 이웃이 잘 살도록 살피라. 독불장군 나 혼자만 잘 살 수는 없는 것이요 더불어 사는 것이 인생이라.

 

6)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우리는 흔히 강물에 대하여 말하기를 어제 본 강이나 오늘 본 강은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어제 보았던 강물은 이미 내려가 없어졌기 때문에 오늘 보는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란 말을 하고 있다.

생명의 터전이 되고 있는 육체도 이와 같아서 우리의 몸은 약 60조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이 세포들의 일반적인 수명은 100일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세포들로 이루어진 나의 육체도 100일이 지난 뒤에는 죽어 없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오늘의 내 모습과 별 차이 없이 그대로 형체를 유지하는 이유는, 현재의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이 수명을 다하고 죽어 없어져도 그와 똑같은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죽어 없어진 세포들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의 강물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한 현재의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모체의 수정란으로부터 시작하여 열 달 동안 발생의 과정을 거치고, 어느 날인가 탄생의 고성이 있었고, 그 후 열심히 먹고 성장하여 과거의 나 로 부터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여 현재의 내가 이루어진 것이지 어느 순간 불쑥 생겨난 것은 절대 아니다.

현재의 란 반드시 끊임없는 과거의 결과들이 쌓여진 것일 뿐, 현재란 과거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란 반드시 과거가 쌓여 나타난 결과의 현상 일 뿐이다.

그러한 현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미래로 미래로 달려가고 있으니 현재는 또한 미래를 만들어 내는 필연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상황에 처해 있는 현재의 나는 좋든 싫든 모두가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낸 지난날의 결과일 뿐이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현재에서 과거를 반성할 줄 알고 현재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지혜를 가질 줄 알아야 할 것이다잘살기 원칙 6 : 현명한 자 현재에서 과거를 반성할 줄 알고, 현재에서 미래를 설계할 줄 알라. 모든 현상계는 필연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나 란 존재도 과거의 탄생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현재의 내가 있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과거의 탄생이 필연적 이었다면, 현재를 있도록 한 그 과거는 상대적으로 미래를, 그리고 탄생은 죽음을 다시 부르게 되니 과거의 탄생은 현재의 나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지만 미래의 죽음 또한 필연적으로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인생이란 어느 날 어떻게 어떻게 하여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수정을 시작으로 해서 그 만남이 원인이 되어 새로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새로운 결과를 만들고,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져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음으로 이어지는, 어쩌면 먼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과 같은 허무 그 자체 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현재의 나는 과거의 탄생에 의하여 가능하였고, 다시 미래에는 필연적인 죽음을 포함하고 있으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숙명적인 죽음의 길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라는 사람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죽지 않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원초적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기 위하여는 죽지 않고 살아야 하지만, 또한 미래에는 반드시 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골치 아픈 상반된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이 란 골칫거리 인생인가 보다.

 

7) 부모와 자식

어떻게 하면 골치 아픈 상반된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 할 수 있을까?

살되 살지 않고 죽으며, 죽되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이렇게 어려울 듯 한 문제의 해답을 모든 생명체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 답은 번식, 생식이다.

, 숙명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지만, 내가 죽기에 앞서 나와 똑같은 제 2의 나를 만들어 놓는다면, 나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또 다른 내가 살아 있으니 나는 죽어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나를 부모 또는 어버이라 부르고, 새로이 만들어진 제2의 나를 자식 또는 자손이란 말로 쓰고 있다.

따라서 생식이란 언제인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유한의 내 생명을 죽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영생의 방법이 되는 것이며, 자식이란 내 생명을 연장해 주는 또 다른 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론으로 볼 때 죽음이 멀지 않은 늙은 부모는 장래가 창창한 희망의 제2인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 할 수 있지만, 거꾸로 자식은 미래가 짧은 나 인 부모를 위하여 투자할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니 부모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말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또한 생명력이 약해져서 죽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혈기 왕성하여 젊은 부모일 때 보다 더욱 애틋해 지는 것도 쉽게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식물들도 보라. 이들도 물을 적게 준다거나 거름을 좀 부족하게 하여 어려운 환경 여건을 만들어 주면 생식의 본능이 작동하여 많은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이며, 벌레 먹은 가지에만 유독 많은 열매가 달리는 것도 같은 이치가 된다. 똑같이 사람의 경우에도 몹쓸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색욕이 강하게 발동하는 것이니, 강하게 色氣를 발하는 사람이라면 머지않아 닥아 올 검은 그림자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잘살기 원칙 7 : 잘 살고 싶은 자 자식 많이 만들어 잘 키워라. 자식은 바로 희망의 나 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적인 교접이 단순한 감각적 유희가 아니라 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새 생명 창조의 성스러운 행위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성적인 접촉은 생명연장의 방법으로만 쓰여 져야 한다는 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8) 창조의 원칙

이렇게 나의 탄생은 사전 계획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어느 날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인하여 새로운 인생이 시작 되는 것이니, 어쩌면 수정이란 로부터 를 탄생시키는 위대한 창조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체세포분열은 단순히 과거의 세포로부터 그와 똑같은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의 몸을 유지시켜주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새 생명 창조의 수정 과정은 좀 특이해서,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특수세포가 있어야 하고, 다시 이 두 종류의 세포가 하나로 결합할 때 만이 비로소 한 생명의 시조세포가 되는 수정란을 탄생 시킬 수 있는 것이며 나아가 새로운 생명체도 탄생 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로부터 새로운 를 탄생시키기 위하여는 서로 다른 성질을 갖는 두 종류의 정자와 난자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런 것 들을 다른 표현으로 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대부분의 물질들도 이와 같아서 음의 전하를 띄고 있는 음이온과 양의 전하를 띄고 있는 양이온이 전기적인 인력에 의하여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로 결합하여 그 결과 물질의 기본단위라고 하는 분자를 이루고 있다.

 

9) 결혼은 영생을 위한 방법

생명 연장이란 관점에서 결혼을 생각하여 보자.

생물체는 숙명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 한 자신의 생명을 무한으로 연장시키기 위하여 죽기에 앞서 제 2의 나 인 자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이 지구에서 로 부터 를 탄생시키기 위하여는 묘하게도 서로 다른 둘의 결합을 요구 하는 것 같다.

당연히 하등한 생물들은 예외도 많이 있지만, 최소한 고등한 동식물들은 반드시 서로 다른 둘의 결합이 요구되고 있다. 왈 수정이다.

따라서 사람도 미래의 나 인 자식을 만들기 위하여는 서로 다른 둘이 결합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정자와 난자 이며, 이 정자와 난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 하나로 함께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자식 없는 결혼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자식이 없다면 당연히 그 결혼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혼하고 갈라서는 것은 자명한 일 이리라. 간혹 혈기왕성한 젊은이 들이 나는 너만 있어주면 된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맥도 모르고 하는 큰 잘못으로 나이가 들어가게 되면서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부부가 행복하게 백년해로하기 위한 첫걸음은 자식을 많이 두는 다산多産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고 있는 촌수寸數란 한 사람을 마디로 보고 사람과 사람(부모와 자식)을 연결해 주는 혈연의 사슬을 一寸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부부간은 직접 연결된 혈연은 없기 때문에 무촌이 되며, 헤어지면 당연히 남남이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남녀가 결혼하여 생산 활동을 다 마쳤으면 서로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당연히 없어지게 되고 따라서 이혼 하고 갈라서야 이론상 맞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함께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 일까?

그 이유는 이들 부와 모를 자식들이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부와 모는 서로 각각이지만 자식이렇게 부와 모 사이에 그들의 공통 자식이 혈연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줌으로써 같은 자식을 공유하고 있는 부부는 한 덩이로 묶여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부부가 이혼하지 않기 위하여 자식은 얼마나 필요 할까?

당연히 연결 고리가 많을수록 끊어질 가능성은 적어지겠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전래동화 나무꾼과 선녀 에 숨겨 져 있다. 좀 더 세심한 관심을 갖고 살펴본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요, 나아가 숨겨져 있는 깊은 진리의 교훈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래동화도 단순히 재미로만 읽었던 옛날이야기로 그치지 말고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할 것이다.

잘살기 원칙 8 : 잘 살고 싶은 자 자식 많이 만들어라. 그래야 이혼 당하지 않고 백년해로 할 수 있다.

 

 

(2) 인체의 구조적 고찰

 

사람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이유로 신체적 구조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즉 사람이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 진화하여 앞발을 들고 보니 직립 보행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직립보행이 인류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 오게 된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1) 직립보행에 대한 고찰

직립 보행의 결과 사람의 몸통은 머리를 수직으로 떠받치는 구조가 되었고 이런 구조적 변화는 역학적으로 큰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직립 보행은 뇌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뇌의 용량이 증가됨에 따라 사람은 두뇌활동도 급격히 활발하게 되어 다른 동물들 보다 차원 높은 지적 생활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적 발달이 만물의 영장으로 될 수 있는 가장 큰 기반이 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짐승과 달리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는 지적智的인 생활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잘살기 원칙 9 : 잘 살고 싶은 자 머리를 잘 쓰라. 잘 생각 하라.

직립 보행이 가져온 또 다른 면도 있다.

원래 사람의 조상이 네발로 기어 다닐 때에는 시선이 바로 코앞의 땅 만을 바라보았는데 직립 보행을 하게 되면서 시선도 자연히 먼 곳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변화가 오래 지속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꿈꿀 줄 알고, 정신적 이상향을 추구하기도 하며, 예술과 철학, 종교 등을 생활 속으로 끌어 들이는 등 생활양식과 가치관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발달 역시 사람이 일반 짐승들과 다른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잘살기 원칙 10 : 잘 살고 싶은 자 오늘은 내일을 위한 오늘이 되도록 하라. 멀리 보는 안목을 키워라.

 

2) 앞다리에 관한 고찰

직립보행의 결과 앞다리를 들고 보니 과거에는 걸어 다니는데 쓰이던 앞다리가 특별히 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할 일이 없어진 앞다리의 발가락을 한 개의 엄지와 네 개의 손가락 구조로 변화시키고 보니 물건을 잡거나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러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구조적 변화는 다시 두뇌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하였고, 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재와 같은 과학문명, 물질문명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잘살기 원칙 11 : 잘 살고 싶은 자 손재주를 잘 키워라.

 

 

 

. 형이상학적 고찰

 

(1) 사람의 구성

동의보감으로 널리 알려진 허준 선생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는 먼저 병이 생긴 원인을 알아야 하고, 병이 생긴 원인을 알기 위하여는 사람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고 하여 동의보감 맨 앞에서 사람의 구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즉 사람은 정()과 기()와 신()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과 기()와 신() 이란 것이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要素라고 보고 있는데 비단 허준 선생 뿐 만 아니라 한의학 저변에 깔려있는 매우 중요시 되는 개념이며, 나아가 유교, 선도교, 등 등 모든 동양사상 전반에 걸쳐 폭 넓게 자리 잡고 있는데, 그 현묘하기가 끝이 없어서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윤곽만이라도 살펴보도록 한다.

은 사람을 이루는 육체 또는 육체를 이루는 요소로 해석하면 될 것 같고,

은 생물체를 이루는 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통일적으로 조종해 주는 지휘자, 또는 마음체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며,

의 명령에 따라 인 육체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에너지원 이라고 생각하면 대략의 개념에는 접근이 될 듯하다.

그래서 허준 선생은 의 어디에, 어떻게 고장이 나면 어떤 약을 쓰고, 어디 어떤 에 고장이 나면 어디에 어떻게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며, 에 고장이 난 어떤 증상에는 어떤 방법이 있다이렇게 크게 셋으로 나누어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을 고치는 약 방문과 를 고치는 침 뜸 방문은 잘들 말하고 있지만 을 고치는 신방神方은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허준 선생의 이론인, 인체를 이루고 있는 의 개념을 컴퓨터(PC)에 비교하여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듯하여 비교하여 보기로 한다.

이란 반도체 칩을 비롯한 하드웨어 즉 컴퓨터 본체로 보면 되고,

란 컴퓨터를 작동되게 해주는 에너지 즉 전기로 보면 되고,

이란 OS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 즉 쏘프트웨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컴푸터를 쓰기 위하여 는 먼저 에 해당하는 기계적 본체 즉 컴퓨터 몸체를 사와야 하고, 다음에는 본체인 기계가 일정한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에 해당되는 프로그램을 깔아 놓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에 해당하는 에너지 즉 전선을 플러그에 꼽아야 비로소 컴퓨터를 쓸 수 있는 것과 흡사하다.

또는 자동차의 운행으로 비유하여 생각해도 비슷한 경우가 될 것이다.

즉 자동차 몸체를 으로, 차가 움직이게 힘을 내주는 기름을 , 그 차가 잘 움직여 가도록 운전하는 사람을 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이 으로 되어 있어서 이들 간에 긴밀하게 조화를 잘 이루고 움직여 갈 때에야 비로소 원만한 삶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2) 동양사상에서의 탄생과 죽음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를 이끌어 왔던 주인에 해당하는 명령체 즉 이란 집 속에서 오래도록 살다 보면, 집에 해당하는 은 낡게 되어 더 이상 의 명령을 수행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란 집 속에 더 이상 머물러 살지를 못하고 빠져 나가게 되는데, 이와 같이 육체인 으로부터 마음체인 이 분리되어 빠져 나가는 현상을 죽음이라 보고 있다.

정과 신이 분리 되고 나면, 전체적으로 질서 있게 협력하여 움직이므로 하나의 생명체로 유지 되던 육체 즉 , 통일된 활동을 지휘하던 명령 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생명활동도 할 수 없게 되고, 한 낱 살덩이에 불과하게 되어 결국에는 썩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이 경우 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이 일시적으로 허공을 맴도는 때가 있는데 이것이 왈 귀신이다.

이렇게 허공을 떠돌던 귀신 즉 혼백이라는 것은, 합당한 인연을 만나게 되면 다시 이 될 수 있는 집 즉 수정란 속으로 들어가서 잠시 동안 새로운 주인이 되는데, 이로써 새로운 탄생이 시작 되는 것이다.

정리하여 본다면 죽음이란 이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고, 탄생이란 이 새로운 활동을 하기 위하여 생활의 터전이 되는 을 찾아 들어오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죽음과 탄생의 현상을 흔히 비유하여 입고 있던 옷을 벗는 일 또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일 정도로 보고 있다.

사람이 새 차를 구입하여 운행하다가 낡아지면 폐차시키고, 다시 새 차를 구입하여 타는 일로 생각하면 이해도 쉬우리라.

잘살기 원칙 12 : 잘 살고 싶은 자 이 떠나지 않도록 精養을 잘 하라.

 

(3) ‘를 찾아서

그렇다면 , 인생은 무엇인가?

이 알맞은 을 결정하고 들어가서 변화해 가는 어느 과정 !

마치 아침이 되면 동녘에 해가 떠오르고 한낮에 중천 했다가 저녁이 되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변화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말인가 !

하나의 난자와 하나의 정자가 수정하는 순간 나의 모든 인생 노정은 DNA 라는 물질에 의하여 그 각본이 이미 결정되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몸은 숙명적으로 확정지어져버린 꼭 가야할 길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울고 웃다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어쩌면 무대 위에 올려 져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기만 하게 끝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에게는 라고 주장하는 마음의 작용, 그 무엇이 있다.

선현들의 말씀을 빌리면 영혼(혼백) 바로 그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를 살펴 볼 때 혼났다’ ‘혼줄 빠지게...’ ‘넉두리’ ‘넉나간 사람’ ‘넉살머리’ ‘얼간이’ ‘혼백을 모시다’ ‘반혼제등등의 말들을 쓰고 있는데 이는 모두 혼백과 관련된 말들로써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는 영혼백-정기신의 개념이 생활 전반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양면성을 갖고는 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 서양으로부터 과학문명과 함께 자본주의가 급격히 밀려들어옴으로써 우리들의 생활방식이나 직업 문화 사고방식 또는 가치관에 까지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조상님들이 이루어 놓은 높은 철학적 정신세계에 대하여는 까마득히 망각되어져 가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 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고 있는 영혼에 대하여는 그 존재조차도 등한시 해버리고 있으니, 당연히 인생을 바르게 알 수 없는 것이며, 그저 대충 살다가 때가 되면 생전에 자신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또 방황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에서 차 값이 제아무리 비싸다 하더라도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운전자인 사람이어야 하는 것과 같이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진정한 나의 주인은 바로 영혼이란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사람을 평가 할 때, 그 사람의 얼굴 생김새만을 본다거나, 몸 짱이란 말처럼 몸매만을 보고 혹한다거나, 재산 또는 사회적 지위 등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라. 사람의 평가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 으로써 진실된 마음씨 이고, 다음이 으로써 착한 마음씨 이고, 마지막에 가서야 외적인 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즉 평가의 첫째도 둘째도 형이상학적인 무형의 상이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형이하학적인 유형의 형이었다.

 

(4) 안다는 것 지식

이제 방향을 돌려 내가 알고 있다는 지식에 대하여 살펴본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도 별 관심 없이 그냥 적당히 알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과연 내가 안다는 것, 지식이란 무엇인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내 놓기 전 까지만 해도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은, 지구는 책상같이 평평한 것이며 큰 거인 넷이 그 지구를 떠 밭치고 있어서 너무 멀리 나가면 떨어져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태양을 비롯한 뭇 별들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갖고 있던 이 지식이 옳은 것인가? 과연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천동설이 전혀 잘 못 된 것이라는 가능성이라도 짐작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지식은 과연 모두 참된 것이라고 장담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다는 지식()이라는 것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것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나의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로 부터 정보들을 입수하고 그 정보들과 그 정보들을 다시 종합적으로 연결 지어 나의 뇌에 입력 저장하였다가 필요할 때에는 불러내어 쓰고 있는 즉 나의 뇌에 내가 저장한 각종 정보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하여 옆에 있던 사람이 이건 무엇이다라고 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옆 사람이 말한 그 정보들을 별다른 여과 없이 그대로 자신의 뇌에 입력 저장하여 자기의 지식으로 굳어 버리는 경우가 거의 일상화 되어 있다. 특히 선생님이란 칭호를 갖는 사람의 말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으니 당연히 정보를 준 사람의 말이 잘못 된 말일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다른 예를 살펴보자. 내가 눈으로 보았다고 반드시 있는 것 일까?

물론 아니다. 무지개는 분명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실존하는 물체는 아니다. 다만 물방울들에 의한 굴절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무지개는 분명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존재하는 물체는 아니고 다만 어떤 현상일 따름이다. 존재와 현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고 있는 꿈은 여러 가지를 보고 있지만 대부분의 꿈은 있지도 않는 것을 보는 경우에 해당한다( 물론 예외는 있음 ).

사람의 눈은 볼 수 있는 빛의 파장 법위가 정해져 있어서 자외선이나 적외선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볼 수가 없다. 공기나 열기, 냉기, 전기, 또한 무엇인가가 있긴 있는데 우리 눈으로는 보지는 못한다.

귀에서 느끼는 소리도 마찬가지여서 가청주파수 범위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다.

정리해 보자. 내가 보았다고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며,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드시 없다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될 것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나아가 모든 감각 작용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을까?

유치원 아이들도 잘 하는 ‘1+1=2’ 이것이 과연 맞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1+1=2’가 성립되는 것은 물질의 3가지 상태 중에서 고체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액체나 기체의 경우에는 전혀 아니요가 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1+1=2’ 가 틀릴 수도 있음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1+1=2’ 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고체의 경우라는 전제조건을 붙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활 속에서 어떤 특수 상황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살다 보면 앞의 경우와 같이 그 특수상황이라는 전제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적용시켜 버림으로써 커다란 착각 속에서 헤매게 되는 어처구니없이 모순된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본인은 이렇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우리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상적인 고정관념에 빠져,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착각된 허깨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를 돌이켜 보고, 잊어버린 참된 , 그리고 올바른 지식을, 그리고 참된 진리를 찾아, 바른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한번쯤은 바꾸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5) 동양 고전의 탐색

이러다 보면 세상만사가 다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여기에서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대학의 첫 구절 대학장구를 살펴 보자.

유가에서 공자님 직법으로 나온 것은 대학大學중용中庸이 두 가지라 하는데, 대학이란 것이 뭣 때문에 나왔는가 하면, 공자님이 수제자인 안자顔子가 일찍 돌아가시니까, 의 심법心法을 전할 데가 없어져 버리고 말아 대학, 중용을 만들어 내 놓은 것이라 한다.

원래 대학을 내놓으실 때에는 대학이란 별개의 책으로 만들어 내놓은 것이 아니고 예기禮記절차에다가 넣어 놓으셨는데, 훗날 주자가 한 대목 씩 뽑아 모아서 대학이란 책으로 만든 것이고, 공자님은 원래 글자만 넣어 놓았는데, 주자가 구절을 찍어 놓은 것이라 한다.

즉 주자가 뒷사람들이 대학을 이상하게 볼까 봐 대학지도大學之道, 재명명덕在明明德, 재신민在新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 ”라고 구절을 찍으셨다고 한다.

풀이해보면 대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라는 것은, 명덕明德을 밝히는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지극히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데 있느니라. 이렇게 하셨는데 주자가 공자님의 마음을 몰라서는 아니겠지만, 이것이 공자 원문에 한 거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지 않은가 생각 된다고 한다.

즉 대학이 삼강령三綱令 팔조목八條目이라 하는데, 주자가 토를 단 것은 하나지 셋으로 나눠 놓은 데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님의 원래 대학사상은 대학지도大學之道는 대학이라는 데서 도를 가르치려고 하면, 라는거는 재명명在明明 하며 선천적으로 하느님한테 타고나서 선천에 밝았던 것을 다시 밝히는데 있으며, 이라는 것은 도는 형이상이요 덕은 형이하 이므로 덕은 새롭게 자꾸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백성 들은 제 힘껏 최선의 노력을 하면 된다’. 이렇게 해야 삼조목이 되고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공자님은 대학을 셋으로 나누었고 明明이라 선천에 밝았던 것을 수련으로 깨끗이 다시 밝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대학에서 대학장구 바로 다음 문장을 보면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 지지이후유정 정이후능정 정이후능안 안이후능려 려이후능득 )이란 글이 나오는데 이 문장은 바로 앞의 대학장구에서 明明을 수련해 나가는 과정을 순서대로 적은 것으로 대학에서 明明(修練)의 무게를 더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한다.

다음으로 주역을 살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역을 점하는 책으로 보는데 속 내용은 전부 정신철학이라고 한다. 즉 주역 전체로 볼 때 신자神字가 꽤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봐도 역학이란 정신방면의 전체를 주장해서 쓴 것이라 보는 것이다.

즉 주역을 역유성인지도사易有聖人之道四라고 해서, 그 하나는 글자만 보거나 괘로만 보는 사람도 있고, 그 둘은 형이상을 봐 가지고 물건이나 기계를 만드는 사람도 있고, 그 셋은 수를 놔 가지고, 뭣을 아는 사람도 있고, 그 넷은 끝에 가서는 그게 아니고 역은 무사야無思也하며 무위야無爲也하야 적연부동寂然不動이라가 감이수통 천하지고感以遂通天下之故 하나니 비천하지지신非天下之至神이면 기숙능여어차재其孰能與於此哉리오 라 했으니, 정신의 지극한 신이 아니면 어떻게 알겠느냐? 하였으니,

무사야하며 무위야하야 적연부동이라면 이 말의 뜻은 정신수련을 하느라 가만히 앉아 있다가 거기서 온전히 통해 가지고 세상만사를 들여다보니까 천하에 모를 거 없이 다 알게 된다는 그런 소린데, 이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역학에도 귀하다 한다.

그래서 공자님은 역유성인지도사易有聖人之道四, 이런 거를 얘기하고, 그 끄트머리 계사전繫辭傳에 가서는 정신, 즉 형이상학을 주장하여 주역 공부는 형이하에서부터 연구해 나아가 가지고 형이상에 통해라 그런 말이라 한다.

주역은 문왕과 주공이 만들어 놓았지만 계사전은 공자께서 계사를 하신 것이다. 여기에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이 중국의 역대 제일 시작으로부터 해 놓았는데, 그 요순임금 전에는 누가 했었냐 하는 것을 계사전에다 슬쩍 집어 넣어놓았다 하니 즉 고자포희씨왕천하古者包羲氏王天下.....”

해석하여 보면 복희씨가 천하의 임금 노릇 할 적하면 요순보다 먼저 했다는 게 사실인데, 그러면 복희씨는 호천금궐昊天金闕이라고 해서 금빛나는 대궐에 거하는 하느님이렇게 되었는데 우리로 말하면 단군이시다. 몇 세 단군인지는 모르지만, 복희씨가 ! ...

이렇게 공자께서는 주역 계사전에 복희씨를 슬그머니 등장시켜 놓고 눈 있는 사람은 보라 하신 것이라고 하니, 그저 후학은 세상사에 조금의 눈을 뜨는 일조차 까마득하여 한없이 작게만 잦아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성현들의 안배와 속마음에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다.

이렇게 공자님이 대학에서, 중용에서, 주역에서 거듭 거듭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음을 살필 줄 알아야 할 것이요, 바른 종교라면 기타의 모든 종교에서도 한결 갗이 추구하고 있는 그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맺음 말

 

세상은 넓고 나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라 눈은 있으되 봉사와도 같고, 귀는 있으되 귀머거리와 다를 바 없어서 자연의 진실 된 말을 보지도 듣지 못하니...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고 노력하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들어보려고 노력하며, 모든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좁은 우물로부터 벗어나서 넓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고, 바로 살려고 하는, 새로운 마음의 자세가 필요 할 것 같다.

잘 산다. 무엇이 진정 잘 사는 것 일까 !

옛 글 영운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諸發樂先生 제발락선생 : 모든 것을 발(시작)할 때에는 락()이 먼저 하여야 하니

僻破誅惡性 벽파주악성 : 치우친 (간사한) 마음을 깨쳐 버리고 악한 성품은 베어 없애라.

禽獸避禍機 금수피화기 : 금수도 화를 당할 기틀을 피하여

網穽飛走輕 망정비주경 : 그물이나 함정을 가볍게 날거나 뛰어 넘는데

氓痴不識死 맹치불식사 : 백성들은 어리석어 죽음을 알지 못하니

焉能知生途 언능지생도 : 어찌 능히 삶의 방도를 알 수 있으리오

 

우리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 진정 바르게 사는 길, 살아가야할 길을 찾아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이라도 해 보자.

 

 

2010 7

末學 太天 安庚洙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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