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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符都誌 제 6 장. 잃어버린 부도 의 법

부도지 符都誌   제 6 장 : 잃어버린 부도의 법  第二十五章 이로부터, 천산(天山) 남쪽 태원(太原)의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주인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소위 장님은 백성이 되어, 암흑이 중첩하였다. 강자는 위에 있고, 약자는 아래에 있어, 왕과 제후를 나라에 봉하고, 생민(生民)을 제압하는 풍폐(風幣)가 만연하여 고질이 되고 마침내 서로 침탈하기에 이르니, 헛되게 생령(生靈)을 죽이고, 한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하은(夏殷)이,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유호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성생(月息星生)의 땅에 들어가니..

역사/상고사 2025.02.05

부도지 符都誌 제 5 장. 오행(五行) 의 화(禍)

부도지 符都誌   제 5 장 : 오행(五行) 의 화(禍)  第十七章 이 때에 도요(陶堯)가 천산(天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다. 일차로 출성(出城)한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堡)의 간(干)에게서 도(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수(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수5중(九數五中)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중5(中五) 이외의 8은,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내(內)로써 외(外)를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오행(五行)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有因)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역사/상고사 2025.02.05

부도지 符都誌 제 4 장. 임검(壬儉)씨 시대 (조선시대)

부도지 符都誌   제 4 장 : 임검(壬儉)씨 시대 (조선시대)  第十二章 환웅씨가 [75]임검(壬儉)씨를 낳았다. 때에 사해의 제족(諸族)이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혹(迷惑)속에 빠져, 세상이 고통스러웠다. 임검씨가 천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천웅의 도(天雄之道)를 닦아, 계불의 의식을 행하여,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갈고, 심고, 누에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交易)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임검씨가 뿌리를 먹고, 이슬을 마시므로, 몸에는 털이 길게 나가지고, 사해를 널리 돌아다니며, 제족을 차례로 방문 하였다. 백년사이에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해혹복본(解惑復本) 할 것을 맹서하며,..

역사/상고사 2025.02.05

부도지 符都誌 제 3 장. 배달국 시대

부도지 符都誌   제 3 장 : 배달국 시대  第十一章 환인씨의 아들 환웅씨는 태여날 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 삼인을 계승하여, 수계제불 (修계除불) 하였다. 천웅(天熊)의 도를 수립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래한 바를 알게 하였다. 어느덧 인세(人世)가 의식(衣食)의 일(業)에만 편중하므로, 환웅씨는 무여율법(無餘律法) 조(條)를 제정하여, 환부(鰥夫)로 하여금 조절하게 하였다. 1조는, 사람의 행적(行蹟)은, 때때로 깨끗하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생귀(生鬼)가 되지 않게 하고 번거롭게 막혀, 마귀(魔鬼)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통명무여일장(通明無餘一障)하게 하라. 2조는, 사람의 취적(聚積)은, 죽은 뒤에 공을 제시하여, 생귀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게 하고, 함부로 허비하..

역사/상고사 2025.02.05

부도지 符都誌 제 2 장. 부도(不渡) 의 시대

부도지  符都誌제 2장 : 부도(不渡) 의 시대   第五章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유천(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나 되었다. 곧 돌아와 소(巢)에 오르니, 배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 귀에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의 넝쿨에 달린 [31]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곧 소(巢)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넓고도 크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한다.이 어찌 도(道)인가!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소씨의 말을 의심하였다. 지소씨가 참으로 좋..

역사/상고사 2025.02.05

부도지 符都誌 제 1 장. 마고(麻故)의 시대

부도지 符都誌   제 1장 : 마고(麻故)의 시대제 2장 : 부도(不渡)의 시대제 3 장 : 배달국 시대제 4 장 : 임검(壬儉)씨 시대(조선시대)제 5 장 : 오행(五行)의 화(禍)제 6 장 : 잃어버린 부도의 법제 7 장 : 삼한에서 삼국으로제 8 장 : 어둠속으로  부도지는 징심록 상교 제1지라고 하며, 우리의 상고사를 기술한 사서중에 가장 오래전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히 기술한 문헌으로 서기 1953 년( 단기 4286 년 ) 박금선생의 프린트본으로 세상에 알려진 책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서의 저자는 영해 박씨의 시조인, 신라 눌지왕때, 치술령 망부석의 주인공인 관설당 박제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도지의 내용을 율과 려, 음과 성, 음상과 향상, 5음 7조의 율려 ..

역사/상고사 2025.02.05

丹學人物考. 유형진 柳亨進

丹學人物考.   유형진 柳亨進                                                              硏精會報 31호 에서  [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찬성(贊成) 오겸(吳謙)의 사위. 어려서부터 도서(道書)를 좋아하여 항상 참동계(參同契) 와 오진편(悟眞篇) 등을 지니고 다니며 道家의 말에 매우 밝았다. ]  병오년(1606)에 허균이 좌막〈佐幕:비장(裨將)을 말 함. 감사 유수 병사 수사 견외사 들에게 따라다니는 관원〉으로 있을 때 강가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우연히 내원암(內院庵)의 주지인 원사리(元闍梨)를 의주(義州) 성주사(聖住寺)에서 만나 방장(方丈:화상 국사 주실 등의 높은 중이 사는 거소)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래서 원사리에게 묻기를 “묘향산은 웅..

동양학/단학 2025.02.05

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2 )

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2 )                                                             硏精會報 29, 30호 에서  정도전은 이로부터 15년 후인 1398년(태조7) 즉 그가 죽을 때 까지 변함없이 이성계를 도와 활약했으며 또한 자기의 포부를 이성계의 권력에 의하여 실현했기 때문에 만년에는 이성계 앞에서 “한나라의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썼을 뿐 아니라 장자방이 또한 한고조를 쓴 것입니다”라고 서슴치 안고 말하여 자기와 태조와의 관계를 태조와 장량(張良)으로 비유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이와 같이 이성계를 찾아갔을 무렵인 1383년(우왕 9) 8월에는 이성계의 유일한 정견 내지는 국방논의라고 볼 수 있는 안변지책(安邊之策..

동양학/단학 2025.02.04

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1 )

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1 )                                                             硏精會報 28호 에서  [ 1337년~1398, 本貫은 봉화. 字는 종지(宗之). 號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을 돕고,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저술, 에 활약, 억불숭유(抑佛崇儒).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 ]   정도전(鄭道傳)은 여말 선초(鮮初)의 시대를 인도한 사상가요, 유학자요, 위대한 정치가였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1337년(충숙왕 6)에 태어난 듯 하며 영주(榮州)에서 세거(世居) 하였다. 그는 두뇌가 매우 명민하고 도량이 크며 호탕한 기상이 있었으나 후세사..

동양학/단학 2025.02.03

丹學人物考. 의상대사 義湘大師

丹學人物考.   의상대사 義湘大師                                                              硏精會報 27호 에서  [ 625년~702년, 속명은 김일지(金日之). 父는 신라 진골귀족 김한신 장군.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고려 숙종).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 ]  법사 의상(法師 義湘)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으로 서울의 귀족이었으며 성은 김씨 혹은 박씨이다. 의상은 20 이 넘어 집을 떠나 황복사(皇福寺)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 사문이 된 그는 이 땅에 큰 이익을 주는 승려가 될 것을 결심하고 이왕이면 당나라로 가서 좀 더 넓고 깊게 많이 배우고저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라가 백제와 사이가..

동양학/단학 2025.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