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망우당 곽재우 忘憂堂 郭再祐

검은바람현풍 2025. 1. 20. 09:14

丹學人物考.

   망우당 곽재우 忘憂堂 郭再祐

                                                          硏精會報 9 호 에서

 

 

[1552(명종7)~1617] 경남 의령현(宜寧縣)에서 탄생. 는 계수(季綬), 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할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승지관찰사를 역임한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本貫은 현풍(玄風). 임진왜란의 대표적 의병장, 홍의장군

 

어렸을 때에는 으로 이름이 났으나 자라면서 를 취하여 병서를 즐겨 읽고 활쏘기 말 타기를 익혔다. 일찍이(3) 어머니를 여윈 곽재우는 성품이 호탕하고 눈에 광채가 빛 나 주위 사람들의 놀라움을 샀다. 8세 때에는 동네 앞에 그의 아버지가 지어놓은 용연정에 올라가 글공부를 시작 했으며 15세에는 사굴산(窟山) 보리사(菩提寺)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는데 이때 남명 조식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 단학을 공부하여 그 오묘한 곳 까지 깨달아 천문 지리 병법 술수 등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특히 병법에는 공명도 무색하리만치 능통한 바가 있었다 한다. 공은 남명 조식 선생의 외손서(外孫婿) 이기도 하였으며 국난을 예견하고 늘 걱정하신 남명선생 인지라 구국을 위하여 성의를 다하여 단학의 정통을 전해주셨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경 새재의 산마루턱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며 탄식하기를 흰 기운이 남방에 가득 찼으니 바다에서 오는 악한 기운 때문이로다. 7~8년 후에는 반드시 바다가 편안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괴로워지겠구나.” 고 하였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그 때 30대로 벼슬을 하지 않은 때였다. 대자연 속에서 낙시로 세월을 보내며 지냈었는데 과연 임진년이 되자 왜구가 바다를 건너 침략해 들어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때 조정은 당파싸움에만 한창이었고 지방 수령들 또한 착취와 사치에만 여념이 없었다. 일부 몇몇 장수가 왜군을 막아 싸웠으나 패하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10만 연합군마저 패하게 되자 민중이 의병으로 궐기하여 국난 수습을 하기 위해 모였다.

지난 날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배척하고 당파싸움에만 골몰했던 조정의 대신들과 왕실은 피난하기에 급급하여 재물을 모으니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고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왕조에 대한 원한에 앞서 민족을 구하려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 의병들은 낙향한 명문거족의 전직 관리나 유학자를 중심으로 모였다.

곽재우도 왜군이 불식간에 김해 양산 대구를 점령하는 것을 보고는 조상들의 무덤을 헐어버리고 통곡하며 그 영전에서 기의(起義)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가재를 털어서 하인 10여명을 데리고 의병의 기치를 들자 심대승(沈大承) 권난(權鸞) 박필(朴弼) 등의 장사들이 호응하여 왔다.

곽재우는 붉은 비단으로 지은 군복을 입고 양쪽에 날개를 단 투구를 쓰고 어디서 왔는지 홀연히 나타난 백마를 타고 의병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같아서 그로부터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가 정암 함안에서의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백성들은 구름같이 모였다.

각지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정암나루에 왔을 때이다. 마침 여름비가 온 뒤라 땅은 질척이고 물은 많아서 진군에 어려움이 많을 것을 안 왜군들은 선발대를 보내어 마른땅을 향해서 나무를 꽂아 표시를 했다. 이를 안 곽재우는 밤에 몰래 그것을 뽑아 진흙이 많은 곳으로 바꿔놓고 근처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새벽에 왜군이 나무표시를 따라 진군하자 곧 진흙에 빠져버렸다. 이때를 틈 타 의병을 풀어 기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장군은 때로 자기와 똑같은 복장과 차림새를 한 10 여명의 부하를 각 곳에 매복시켜 왜군의 전선을 혼란시키기도 하고 밤이면 하나의 막대기에 다섯 개의 횃불을 달아 서로 연락하게 하여 의병전술을 쓰기도 하고 20~30 리마다 정찰병을 두어 100리 밖의 작전상황도 훤히 알아내었다.

그의 용병술은 전과와 함께 경상도 일대에 있는 백성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으며 부하가 되려는 사람들 수 천명이 모여들어 그 기세가 더욱 높아졌다. 그가 낙동강 서쪽에 진을 치고 상류에 이르는 곳곳에 의병을 잠복시킨 때문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백성들은 평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왜군이 군세를 다시 정비하고 영산 창녕을 넘어 거름강에 이르려 하자 곽장군이 먼저 손을 써서 그곳을 점령하였고 그 때문에 철수하는 왜적들을 성주까지 추적했다. 이때 곽장군의 의병은 단순한 민병이 아니라 정예군 이상으로 조직적이었다고 한다.

그 해 10월 왜군들은 창원 부산 김해의 병력을 모아 정암나루에서 패퇴한 병력과 합쳐 진주성 공략에 총력을 기울였다. 진주성은 호남 일대의 곡창지대로 들어가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진주목사 김시민이 38백 여 명의 병력과 일반 백성들로 3만의 왜병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왜군의 기습이 치열해지자 곽장군에거 위험한 전황을 알리고 저항했다. 곽장군은 부하 심대승에게 정병 200을 주어 구원하게 하였다. 이들은 곽장군의 계교대로 진주 교외에 있는 비봉산에 들어가 어지럽게 나팔을 불고 또 밤에는 다섯 개의 횃불이 달린 막대기를 흔들어 공격하는 왜군의 기세를 꺾고 진주성의 군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때마침 도착한 전라도 의병대장 최경희의 군사를 곽재우의 군사로 오인 한 왜군은 기세가 꺾이어 철수하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로 불리어지는 진주대첩이다.

 

곽재우 장군은 가는 곳 마다 신출귀몰 한 전략으로 승리하고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임진란 중에 많은 공을 세웠다. 선조 29(1596) 10월 하왕산성 전투 중에 계모 허씨의 상을 당하자 생전에 못 다한 효도를 하여야 한다고 3년 상을 지내려 강원도 울진으로 갔다. 이 때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직책과 하교를 내려 군무에 돌아올 것을 명했으나 사람의 도리를 지킬 것을 청원하여 나가지 않았다.

조정에서 계속하여 벼슬을 내려 부르던 중 3년 상이 끝나 경상좌도절도사라는 벼슬을 받아들였으나 이 때는 이미 전란이 끝난지라 고양이를 기르는 까닭은 쥐를 잡기 위함이다. 지금 왜적이 평정되어 나는 할 일이 없으니 떠나도 되겠구나하고 사퇴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입산하여 단()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홍여순이 곽재우를 모함하여 3년간 전라도 영암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유배생활이 끝나자 비슬산(琵瑟山) 산속에 몸을 숨기고 낙동강 강변 청암에 정자를 짓고 글을 읽으며 조용히 솔잎만 먹고 연기법(연기법)을 수련하였다.

이때 시를 지었다.

    내가 화식을 끊었다고 친구들이 불쌍히 여기지만

    낙동강 가에 집을 함께 지어보세

    배주림이 없으니 다만 솔잎만 먹기 때문이요

    목마르지도 않으니 옥같은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네

    고요함을 지켜 거문고를 타니 마음이 담담하고

    창을 닫고 고른 숨을 쉬니(조식) 뜻이 그윽하네

    한백년이 다 지나 망양지탄 할 적에

    나를 비웃던 이들 또한 나를 신선이라 부르지

 

선산사람 승지 박수홍(朴守弘)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을 찾아갔다. 은 박수홍에게 장차 무었을 하고자 하는가하니 박수홍이 과거를 보러 갈 따름입니다고 답했다. 공이 거듭 묻기를 이런 때 과거를 보아 무슨 소용이 있소하며 술상을 차려 너댓잔 마시다가 불쑥 하는 말이 술 때문에 괴로워 기분이 평안치 못하군하고 그릇을 가져오게 하여 귀를 기울이고 쏟으니 술이 귓구멍으로부터 모두 나왔다. ~ 명신록에서 ~

공은 본시 술을 좋아했는데 술을 마시고 난 뒤에는 곧 다시 쏟아내는데 먹은 술의 양과 나온 술의 양이 같았다고 한다.

이렇게 지내는 중에도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조정에 나올 것을 명했으나 병을 핑계로 모두 물리치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그는 오직 하루에 송화 한 조각만 먹고 지냈으나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졌다 하니 신선의 부류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광해군 9(1617) 강인한 정신과 신출귀몰 한 전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백성과 함께 나라를 구하는데 이바지 했던 공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던 날 비바람이 몰아치고 번개가 치더니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쳤다고 한다.

숙종 35년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익(忠翼)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