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수암 박지화 守菴 朴枝華
硏精會報 7호 에서
1513~1592 화담 서경덕선생의 제자. 정북창과 교류, 정고옥의 스승. 당대의 丹學 巨人
본관은 정선(旌善) 字는 군실(君實), 號는 수암(守菴) 정선 박씨의 시조이다. 서얼 출신으로 화담 서경덕의 제자.
일찍이 易을 서화담에게서 배웠고 정신수련(精神修鍊)을 좋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7년 만에 돌아왔다. 제자가 그 술법을 가르쳐 달라고 물으면 守菴이 말하기를 “세상을 잊고 저 혼자만이 사는(獨行) 선비가 혹 이런 짓을 하지만 학자의 선무(先務)는 아니다”고 하였다. 화담이 종일 수를 따져보고 있었는데, 公이 數를 보니 어떠하냐고 물었다. 화담이 말하기를 “천하의 수를 따져보니 중국이 먼저 패망 하겠다” 하였다. 또 묻기를 “東方은 어떠냐”고 물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과연 3世를 지나 명나라는 숭정(崇禎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연호)에 이르러 도적이 北京을 함락시켰다.
公은 일찍이 고요함을 지켜(守靜) 세간의 사물을 가지고 마음에 경영하지 않았고 천성이 간결하였으며 문장도 또한 그러하였다.
公이 일찍이 사문학관(史文學官)이 되었다가 바로 그만두었다. 학력이 있고 예법대로 몸을 다스렸으며 모든 서적을 넓게 궁구하여 보는 것이 정밀하고 확실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춘천 땅으로 피난하였는데 왜적이 가까이 왔음을 듣고 도리어 몸을 물에 던져 죽었다.
택당(澤堂)이 말하기를 ‘박지화는 서족(庶族)으로 태어나 널리 배웠고 문장을 잘 하였으며 또한 이학(理學)을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고 孤靑 徐起는 천인(賤人)으로 經史를 밝혀 학자들에게 교수하였다. 두 사람이 다 같이 산수를 좋아하였고 명산에 은거하였으니 모두 화담의 門徒의 潮流이며 또한 자못 괴이한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박지화를 말하여 신선이 되어간다고 하니 화담의 기풍을 배운 사람은 대개 이와 같다고 하였다.
“우계속집(牛溪續集-성혼)에 이르기를 박수암 존장(朴守菴 尊丈)은 다만 詩學에 있어서만 매우 놓은 것이 아니고 학문 견식이 거의 근대에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몸소 나아가 선생과 같이 정밀히 간추려 정리하려고 하시고 비록 늙으셨으나 근면하시니 이미 선생으로 더불어 서로 아는 처지이고 보면 반드시 사양하여 물리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許穆)에 이르기를 수암이 북창 정렴과 더불어 서로 친교하였고 古玉丈人(정작鄭碏)이 스승으로 섬겼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北窓(정렴)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이 人倫을 중하게 여겼으니 노씨(老氏)나 석씨(釋氏)도 대개 大同小異 하다 하였다. 항상 탄식하여 이르기를 말이 믿음을 보지 못하고 행실이 실행됨을 보지 못하므로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고 스스로 희롱하여 예법 밖에서 제멋대로 오락가락 하되 일찍이 중인과 다를 것이 없으며 그 남들과 더불어 거처함에 하나도 孔子의 도술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은 대개 그 깨달음이 釋氏와 비슷하고 그 자취가 老子와 비슷하여 그 사람을 가르치되 한결같이 성인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다, 하셨다.
상고하여 보건대 화담의 학문은 특히 기수지학(氣數之學)으로 소강절(邵康節)을 뒤쫓아 갔으므로 별도로 一派를 개발하였으니, 이토정 지함과 박수암 지화 같은 사람은 氣數學을 전하였고 서고청 기는 또한 토정을 쫓아 유학(遊學)하였으니 그 학문이 또한 비슷하므로 택당 이식이 그렇게 말 한 것이다.
(이상 張志淵 著 朝鮮儒敎淵源에서)
학관(學官) 박지화는 일찍이 서화담 선생을 따라 수업을 받았다. 젊어서부터 명산을 유력하였는데 솔잎을 먹고 벽곡(辟穀)하였다. 학자들과 함께 산사(山寺)에서 기거하였다. 그는 한 달 내내 무명옷 한 벌만을 입고 지냈는데 밤에는 책을 베고 누워 자되 보름동안은 왼쪽으로 누워 자고 보름동안은 오른쪽으로 드러누워 자서 그 무명옷은 주름이 없이 새로 다려 입은 것 같았다.
유불도(儒佛道) 세 방면에 두루 뛰어났고 예서(禮書)에도 함께 깊었다. 그는 문장에 가장 정박(精博)했는데 詩와 文이 모두 고절(高絶)하였다.
일찍이 부마(駙馬) 광천위(光川尉)의 만사(挽詞)를 지었는데 시인 정지승(鄭之升 號 業桂堂, 北窓 丹學巨人)이 칭찬해 마지않으면서 “이 사람의 문필은 낮으나 시인들 세계에서의 지위는 최고네” 하였다.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그 때 나이 70 여세 였으나 천심만장(天尋萬丈) 사이를 뛰어넘어 걸음이 나는 듯하였다. 그래서 중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가 성 안에 살 때는 사이를 막아 한방에서 하루 종일 정좌(靜坐)하고 있어 山林 속 같이 고요하고 쓸쓸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서울에 침입하자 백운산(白雲山) 사탐촌(史탐村)에서 왜구를 피할 때 친구 인 정굉해(鄭宏해)와 함께 갔다. 왜구가 백운산에 까지 밀어닥치자 정굉해는 가족을 이끌고 떠나갔다. 수암은 그와 작별을 하면서 “나는 늙고 지쳐서 따라가지 못하니 다른 날 여기 와서 나를 찾게나‘ 하였다. 며칠 후 왜구가 점차 퇴각하자 정굉해가 수암을 찾았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다만 시냇가의 나뭇가지에다 종이조각을 매달아 놓았는데 거기에는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가 쓰여 있었다. 이는 그가 돌을 안고 나무 밑의 시냇물 복판에 빠져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지화는 일찍이 왜구를 피해 포천땅으로 내려갔는데 그 때 나이가 이미 70여세 였다. 산에 올라가서 수풀 속에 숨어서 하루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금년까지 무슨 소용이 있어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려고 바둥대는가“ 하고서 드디어 집안사람에게 옷을 빨라고 하였다. 날짜를 정해 장차 자결 할 생각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감히 그 뜻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그날이 되자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산을 따라 깊은 곳의 곁으로 내려가 소나무 아래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해 저물 무렵에 가서 찾아보니 그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단정하게 손길을 맞잡고 오뚝이 앉아 있는데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끼고 나와 그 웅덩이 가에다가 임시로 매장하였다고 하였다. (이상 홍만종 저 해동이적에서)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중엽에 활약 했던 많은 丹學人들 중 수암 박지화, 고옥 정작, 화담 서경덕, 고청 서기, 남사고, 북창 정렴 등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學風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남긴 여러 詩文이나 후세의 저작물 속에서 증빙할 수 있다. 특히 조선 단학파 중 뚜렸한 족적을 남긴 북창 정렴 선생의 詩集을 보면, 수암 박지화와의 밀접한 교류관계를 드러내는 詩가 6편이나 되며 화담선생에 대한 시가 1편 실려있다.
수암 박지화 선생 역시 조선시대 완고한 사회상과 폐쇠적인 시대주의적 학풍의 희생자로써 특히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하여 당시 지식인으로 갖추어야 할 학문적 소양이나 인격을 충분히 구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품은 웅지를 펴 볼 자리를 얻지 못한 채 평생 국외자(국외자)로써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것이다.
朴公은 일찍부터 우리민족 전통인 현묘지도(玄妙之道) 인 丹學에 인연을 맺어 心身 양면으로 절차탁마 한 결과 정신계의 뚜렷한 계제(계제)를 얻었으며, 당대의 많은 丹學巨人들 및 才士들과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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