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山神 이야기
산신(山神)은 산주(山主)라고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 산을 주관(主管)하는 신령(神靈)이다.
지구의 개벽설화를 보면 최근 약 일만이천년 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장백산(長白山)에 하느님(대황조 한배검)이 내려 오셔서 천지개벽 후 살아남은 인민(人民)들을 교화(敎化)시켰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장백산이 이후 인류문명의 시초가 되었고 중심축으로 기능 하는 우주산(宇宙山)이 되었다.
인민들이 많이 모이자 바이칼호수 부근으로 옮겨가서 본격적으로 교화사업을 펼치셨는데, 이때 대황조의 가르치심을 받아 머리가 밝아진 사람들이 전 세계로 퍼짐으로서 인류문명이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스코틀랜드 출신의 문명사가(文明史家)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거울(Heaven's mirror)』이란 책에서도 지금부터 일만 이천 오백년 전에 전 지구적 대변동-지구개벽-이 대홍수라는 양상으로 인류를 덮쳤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전혀 서로 정신적 교류를 한 바 없는 20세기 한국의 한 선지자(先知者)와 영국의 젊은 문명사가(文明史家)의 인류문명의 시원(始原)에 관한 담론(談論)이 총체적으로 동일한 궤적을 그리며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흥미롭다.
독자 여러분도 『신의 거울』을 일독(一讀)해보시길 권한다.
아무튼 우리 동아시아 상고(上古)문명의 시초는 산이다.
무릇 신화(神話)는 산에서 탄생되었다.
특히 개벽 이래 하느님의 가르침을 최초로 받은 본바닥이 동북아시아 우리 민족의 권역이었던 만큼 산은 이후 온갖 선지자, 도인, 머리 밝은이들의 본향(本鄕)이요 거주처(居住處)가 되었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정신수양의 장(場)으로서, 영혼의 귀의처(歸依處)로서, 숭앙(崇仰)의 대상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당했던 하늘의 자손들이 오랜 비바람 속에 제 뿌리를 다 잃어버리고 망각의 늪에 빠진 채, 남아 있는 것은 다만 민간의 산악숭배신앙 뿐이다.
원래 산제(山祭)는 천제(天祭)였다.
즉 하느님이 이 땅에 처음 내려오신 곳이 산이요, 하늘로 환원(還元)하신 곳도 역시 산이었기에, 이후 하느님에 대한 숭앙의 의식으로서 제사를 받드는 장소가 바로 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산제(山祭)하면 산신령에 대한 제사로서 그나마도 미신(迷信)으로서 민속기념행사 치르는 식으로 치부하고 말지만 과거엔 그게 아니었다.
온 우주에 실재하는 주재자에 대한 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치성(致誠)이요, 보본(報本)의 상징적 표출(表出) 의례였던 것이다.
봉우선생은 누구보다 자주 산신(山神)의 존재에 대해 언급을 많이 하였다.
지금이야 산신하면 무속인들 이나 숭앙하는 대상으로 알지만, 산신은 엄연히 이 법계(法界)에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영혼의 존재이다.
바로 얼마 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무속인이 아니라 국가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아니 고조선, 부여(扶餘),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등 이전의 모든 민족국가들이 한때라도 산악, 산신, 용왕신(龍王神)에 대한 국가적 제사를 걸러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이전 사람들이 봉건적이고 미신적이어서 과학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자연 친화적이고 우주운행의 법칙을 더 잘 아는 현명함이 있었기 때문이라 보아야 한다.
현대인들 이야말로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기고만장하며 살고 있지만, 그 삶의 질이란 것이 과거 어느 봉건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극악한 살인적 야만성과, 주위 자연환경에 대한 무지막지한 수탈로 인하여 정작 최 악질로 치닫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듯 정신적으로 궁핍한 시대에도 산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메마른 삶에 지친 인생들을 마치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인자하게 하늘의 법도로서 안아주시고 달래주시고 심신을 밝게, 튼튼하게 길러 주신다.
산은 영원히 인간 영혼의 안식처이므로, 하늘로 통하는 출입문이므로 그렇다.
역대 우리나라의 모든 전설적 위인, 영웅들이 거의 대부분 산에서 공부했다.
대황조 한배검, 역대 단군들, 동명성왕, 연개소문, 을지문덕, 김유신, 강감찬, 영랑(永郞)을 위시한 동해사선(四仙)등 숱한 화랑도(花郞徒), 송구봉(宋龜峯), 정북창(鄭北窓), 이퇴계, 이율곡, 송우암(宋尤庵), 허미수(許眉 ), 조중봉(趙重峯), 서산대사, 사명당, 서고청(徐孤靑), 조남명(曺南冥), 이토정(李土亭), 진묵대사(震黙大師)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로 보면 산은 사람의 심신을 단련하는 용광로로서 자리했고 특히 영혼의 광명을 드러내고, 키워내는 하늘과 사람이 만나는 교통점(交通點)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학인(學人)이 봉우선생께 물었다.
"산신은 어찌해서 생기나요?"
봉우선생 답하기를 "하늘에서 산신자리를 맡기면 임명되는 것이다" 하였다.
지구에서 도(道)와 덕(德)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선계(仙界)인데, 이 정신계(精神界)의 수뇌부(首腦部)가 바로 북극성(北極星)으로서 원단군(元檀君) 인황씨(人皇氏:대황조 한배검)가 주재하고 있다.
이 선계의 도서관 같은 곳이 금부(金府)인데 여기에 선인(仙人)들의 리스트인 『금부비록(金府秘錄)』이 있다. 『금방(金榜)』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보면 각 국가별로 도인들의 명단이 죽 적혀 있는데, 도인들의 계제가 높고 낮은 것과 천상선계(天上仙界)에서의 직책의 고하(高下)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상에서 도를 닦지 못했으나,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은 선인(仙人)의 계제를 준다.
의외로 천상선관(天上仙官)중에는 지상에서의 충효경렬지사(忠孝敬烈之士) 즉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거나, 부모형제와 타인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즉 선덕(善德)으로서 도인의 계제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천상에서는 도와 덕이 하나라는 것이다.
어쨌든 산신(山神)도 정신계인 천상에서 임명하는 선관(仙官)중의 하나로서 임명직인 셈이다.
지상의 산악을 주관하는 정신계의 관리가 산신인데, 하나의 산에 하나의 산신과 여럿의 부산신(副山神) 및 그 산의 각 지역을 맡은 지역산신들이 존재한다. 산신은 선계에 속한 존재인 바, 천계(天界)와 인간계의 중간적 위치에서 인사(人事)에 관여하는데 본질적으로 도인(道人)이므로 신선, 도인을 희구하는 학인들 에게는 상당히 협조적이다.
도덕(道德)을 참답게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산신을 맡고 있는 산중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뒤를 봐준다.
봉우선생에 의하면 두 사람의 학인을 성공시키면 산신계제도 한 단계 올라간다고 하며 그래서 어떻게든 수도자가 성도(成道)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는 것이 산신의 주요 임무라 한다.
보통 각 지역의 주산(主山)에는 산신이 존재하는데 산주(山主)가 되려면 적어도 정신계(仙界) 유단자로서 2계 이상 가야 그 자격이 주어진다. 여기서 2계라 함은 초계(初階:初覺으로서 자신의 三生을 觀하는 단계)를 지나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선인(仙人)의 계제에 대해서는 『민족비전 정신수련법』의 구계법론(九階法論)에 상세히 실려 있다.
산신 가운데 제일 원만하고 인자한 분은 역시 백두산 산신으로서 정신수련 학인들을 가장 성심껏 후원해 주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聖山)으로서 정신수련파의 조종(祖宗)이 되며, 가장 깊은 연원의 정신수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 이래 수많은 성현(聖賢), 달사(達士), 영웅들의 배출 지 이기도 하다.
계룡산(鷄龍山) 산신은 매우 엄격하다.
정신계 7계 이상으로, 인간으로서 도달 할 수 있는 최고 단계인 성인(聖人)의 경지이다.
지상(地上)에 있을 때 전생에 천자(天子)소리 들었던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산신으로 있으면서도 성인 대접을 해야 좋아한다고 한다.
계룡산 학인들은 지금도 산주(山主)에게는 사배(四拜)로서 예(禮)를 표한다.
가끔 도인들(정신계 4~5계의)이 계룡산에 와서 산신이 영접(迎接:나와서 告함)을 안 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툴툴대는데, 이는 자신의 계제만 알지 계룡산 산주의 계제가 이렇듯 높은 줄은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정신계 4~5단이면 중단(中段)급의 선인(仙人)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중진(重鎭)이 되는 위치에 있으므로, 어느 산엘 가도 대개는 지신(地神)이나 산신이 나와서 영접을 하며 인사를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계룡산은 산은 작아도 정신계의 센터이며 사령부인 천상(天上) 자미원(紫微垣)의 동자미(東紫微) 구성(九星)의 천상(天象)이 조응(照應)하는 원혈(元穴)이 있는 명산으로서 역대로 수많은 성현(聖賢)들의 수도 처 였던 곳이다.
특히 조선조 오백년간 최고의 정신수련 고단자로서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 송구봉(宋龜峯)선생이 성도(成道)하신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수많은 거물급 선인(仙人)들을 배출해온 명산이기에 산주(山主)도 거물급인 듯 하다.
어쨌든 백두산을 빼놓고, 남한의 산중에서 가장 계제가 높은 산신이 주재하시고 있는 산이 계룡산이다.
계룡산의 지역산신(산안에 여러 지역이 있다)이 보통 다른 산의 주 산신(主山神)과 계제가 같을 정도이다. 계룡산 산주는 매우 엄격해서 학인들에 대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엄정(嚴正)하다.
산에 와서 공부에 태만하거나 성정(性情)이 사특한 자는 대번에 퇴출(退出)시켜 버린다.
잔술(小術)도 잘 안 봐준다. 그래서 공부성공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다.
계룡산 초계가 다른 산의 재계(再階:2계) 만큼이나 어렵다고들 한다.
계룡산주 입장에서는 계제를 쉽게 주면 학인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산중이 시장바닥처럼 될 것을 우려해, 그것이 싫어서 먼 산 바라보듯 학인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계룡산 산신은 아기봉과 천황봉, 연천봉을 두루 다니며 산을 주재(主宰)한다고 하며, 오성대(五聖臺;悟性臺)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수련처로 알려져 있다.
속리산(俗離山)은 조선조 명종 때의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자 도인이었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선생이 산신으로 주재하고 있다.
정도(正道)를 걷는 수련학인들은 잘 봐주나, 무당같이 소소한 잔술(小術) 공부는 매우 엄격히 통제하므로 공부하기 힘들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소문이 나있다.
여기서 공부한 무당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속리산 계곡이 다른 산보다 암반이 좋고 널찍 널찍 해서 기도공부를 하기에 아주 좋은 입지조건이라, 공부를 시작했는데 밤중에 한 흉칙한 신장(神將)이 나타나 가시방망이를 들고 마구 두들겨 패더라는 것이다.
그래 그 다음날로 보따리를 쌓아 줄행랑을 쳤다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하였다.
대체로 속리산에서는 무당들이나 잡술을 하는 사람들이 신빨(神發)을 못 받는다고 하며, 억지로 하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미쳐버리거나, 홀연히 죽는다고 한다.
또한 아예 세상을 등진 사람은 산신이 잘 봐주고 출세하려는 야망이 있는 수련학인들은 안 봐준다고 한다.
이준경 선생은 생시에 이미 정신계 중단은 도달한 도인으로서 평소 매일같이 겨울에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것이 바로 제갈공명이 쓰던 백우선(白羽扇)같은 것으로 정신수련의 경지가 깊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을 부치면 어느 곳이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등 수많은 현묘(玄妙)한 작용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준경 선생은 죽기 전에 사위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후 속리산중 한 폭포 밑에 수장(水葬)해 달라.
그리고 대상(大祥) 치르기 전-즉 죽은 후 만 이년 째-에는 자식이라도 일절 곡(哭)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자식에게도 비밀로 했다. 그런데 자식이 뒤늦게 알아 속리산 근처에 사는 사위의 뒤를 밟아 쫓아가서 수장한 폭포를 알아냈다.
그래 대상 치르고 와서 폭포 앞에서 곡을 했더니, 갑자기 물속에서 관이 떠올라왔다.
관을 열어보니 시신은 없고 용 한 마리가 있는데 용이 몸은 다 이루어졌고 다만 여의주(如意珠)만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동고 이준경 대감이 죽은 후 용으로서 변신하려는 기간이 만 2년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하루 못 채우고 실패 했더라는 고사(故事)이다.
이런 연고로 지금 속리산 산신으로 있으면서도 좀 심술을 부린다고 한다.
이런 측면이 무당들이나 좌도(左道)의 소술(小術)을 수련하는 사람들에게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봉우선생이 생전에 대종교(大倧敎) 총전교(總典敎)로 재직 중이실 때의 일이다.
1990년도에 대황조 한배검 야외 경배(敬拜) 행사의 일환으로 속리산 어느 산자락 밑에서 행사를 주관하는데, 도착당시부터 자욱한 안개 때문에 행사 진행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봉우선생이 "성질 급한 늙은이가 왔소이다. 이것만 좀 치워주면 좋겠소." 하며 마치 누구와 얘기하듯 독백(獨白)하였더니 자욱했던 안개가 차일 걷히듯이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싹 걷혀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산신과 직접 교통(交通)하는 장면이 아닌가 한다.
필자나 평소 봉우선생을 곁에서 모시던 많은 학인들은 이런 경험을 대개 한 두 번 이상은 겪게 된다.
즉 허공에다 대고 상대방이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시던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속리산 옆에 경상북도 쪽으로 작은 산 하나가 있는데 이를 청화산이라 한다.
청화산 산주는 박씨 부인이라 해서 고대소설 『박씨부인전』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우리나라 전국의 산신 가운데 유일한 여자 산신이다.
박씨 부인도 역시 도인으로서 소설에서는 남편 이시백(李時白)을 도와 과거에 급제케 하고, 도술로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충렬정경부인에 봉해지는데, 아무튼 실존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청화산 산주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할머니 산신으로 불리고 있어 여성 산신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주 인자하고 학인들의 소원을 잘 들어주며 공부 또한 잘 도와주는 산신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의 관악산(冠岳山) 산신은 얼마 전까지 정몽주(鄭夢周)선생 이었다가 1990년대 들어와 강감찬 장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관악구의 강감찬장군 탄생지인 낙성대(落星臺) 주변에 동상도 새로 세우고, 구청에서 장군을 기념하는 거리 가장 행렬 축제도 신설하는 등 여러 모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듯 하다.
정몽주 선생이 산주로 계실 적에는 극히 엄하여 역시 무당들이나 잔술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고약(?)하게 대했다고 한다.
관악산은 서울의 조산(朝山)으로서 주산(主山)인 북한산 및 도봉산 등을 감시, 관리하는 위치에 있다.
새로운 산주(山主) 강감찬 장군의 탄생에 얽힌 얘기를 소개한다.
장군의 아버지는 당시 고려에서 천하의 난봉꾼 내지 채정꾼(採精-古代 房中術의 행법)의 대가였는데, 역시 도인인 어머니를 만나 하룻밤 만에, 그 많은 여인들의 정기(精氣)를 모아놓은 것을 쫙 빨려서 그 기운 그대로 타고 강감찬 장군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봉우선생의 얘기를 빌리면 "이건 우리 선가(仙家)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야."
다음으로 삼남(三南)의 명산 지리산(智異山)이다.
지리산 산주는 신라의 도인 최고은(崔孤隱:최치원) 선생이었는데 역시 90년대 들어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역사에 가리워 진 남명선생의 실체를 찾기 위해 80년대 후반부터 남명학 연구원이 생기고, 연구 논문들이 모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1995년에는 최초로 선생의 저작집인『남명집(南冥集)』이 경상대학 남명학(南冥學) 연구소에 의해 국역, 출간되었다.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그 사상과 존재의 역사적 의의가 조명되고 있다.
남명 조식은 조선조의 거물급 선비요 학자였으며 정신수련에도 조예가 깊어 선계(仙界)의 고단자이다.
현실적으로 불운하였으나, 임진왜란 등 미래를 예지하고 다가올 국난에 대비하여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였다.
경상도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을 일으켜 혁혁한 무공을 세웠던 이들은 거개가 다 남명의 문하제자들이었다.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정기룡(鄭起龍), 손제자(孫弟子) 김덕령장군 등이 대표적이다.
생전에 교유하던 인물들은 송구봉(宋龜峯), 서고청(徐孤靑), 이율곡(李栗谷), 이토정(李土亭), 성대곡(成大谷) 등이었는데, 특히 송구봉, 서고청과는 계룡산에서 자주 만났다고 한다.
송구봉은 당대 제일의 도인이었으므로 나이 차를 넘어 심법(心法)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사후에도 선계(仙界)에서 교유하며 계룡산에서 만나던 도인들-이토정, 성우계, 영규대사, 조중봉 등-과 일년에 한번 칠월칠석날 전후로 3일간을 계룡산에서 만나 회포를 풀며 노닌다는 전설이 있다. ( * 칠석 : 선계 휴일 : 태천 )
충청남도에서 제일 높은 산인 금산(錦山)의 서대산은 산주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列:1607~1689)이다.
우암선생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조선조 효종, 숙종대의 학자이며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서 대 정치가였다.
당대의 대도인(大道人)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했다. 우암은 어렸을 때부터 힘이 장사였는데, 집이 있는 신탄진(회덕)에서 스승 사계 댁이 있는 연산까지 왕복 80리를 매일 걸어 다녔다.
성격이 매우 우악스럽고, 자기 힘을 믿고 방자한 태도가 지나쳤다.
사계 김장생 선생이 어린 우암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제자로 키우기 위해 기를 꺾어 놓느라 몇 번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그 하나가 목침사건으로, 하루는 사계가 방안에 누워있다 우암을 부르며 네가 힘 좀 쓴다 하니 내가 베고 잇는 이 목침을 한번 빼내 보아라 하였다.
이때 우암은 웃으며 선생님 무슨 장난이십니까? 하며 몇 번 사양하다가 실제로 빼어보려 하니 꿈쩍도 않더라는 얘기다.
또 하나 책상사건 얘기도 있다.
사계가 늘 방안의 책상(書案)을 한손으로 들고 그 밑을 빗자루로 쓸곤 하였는데, 한번은 우암더러 쓸으라 해서 우암이 그 책상을 사계처럼 한손으로 번쩍 들으려 했으나 책상이 바닥에 붙은 듯 전혀 요지부동이라 식은땀만 흘렸다는 일화이다.
이후로 우암이 스승의 분부에 절대 복종했음은 물론이다.
봉우선생이 젊었을 적에 서대산을 방문했다. 서대산 꼭대기 폭포 근처에 우암이 젊었을 때 정신수련 하던 자리가 있었다.
그 바위 틈새에서 우암이 쓰던 명검 한 자루를 발견하고 가지고 내려왔다고 한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우암은 문(文)과 아울러 무학(武學)에도 수련을 많이 쌓은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선비였다 한다.
봉우선생이 이후 중국에 들어가 독립군 활동을 하며 다닐 때 이 검을 갖고 다녔는데, 어느 객잔(客棧:여관)에서 동행1인과 함께 투숙하여 그 복도를 걷다가 복도 가운데가 갑자기 푹 껴져 둘이 밑으로 빠졌는데, 무슨 소설에 나오는 인육만두집 같은 곳으로서 낯선 나그네들을 이런 식으로 잡아먹는 것이었다.
밑이 깊어서 뛰어오를 수는 없어서 마침 지니고 있던 검을 빼어 옆의 벽을 한번 치니, 대번에 벽이 착 갈라지며 무너져 버리는 것이라, 덕분에 빠져 나왔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보검이었다는 얘기이다.
우암은 생전에 노론의 영수로서 거물급 정치가요, 주자(朱子)를 자기 조상처럼 받들던 성리학자(性理學者)였던 관계로 평소 수많은 제자, 문인(門人)들을 길러 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산주(山主)로 있으면서도 그때 따르던 제자들이 지금도 서대산에 득실득실 하다고 한다.
소백산(小白山)과 태백산(太白山)의 산주는 잘 밝혀져 있지 않으나, 성격이 원만하고 학인들이 노력한 대로 잘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신다고 한다.
소백산은 특히 정신수련법 가운데 좌도(左道)공부의 중심지로서 조선조 말엽 128명의 장사(壯士)들이 배출되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곳이다.
지금 속리산 산주로 계시는 동고 이준경 선생이 바로 이 소백산에서 수련하였고 끝마무리는 속리산에서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예전에는 우도(右道) 성공자도 많이 나왔었다.
그 밖에 월출산(月出山)은 산주가 무척 까다롭다고 하며, 호남의 인물이 대대로 끊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이 월출산이 천상(天象)에 조응(照應)하기 때문이라 한다.
무등산(無等山) 산주는 대체로 인심이 후한 편이며 일월산(日月山)은 비록 큰 산이나 산신은 작다고 한다.
서울의 삼각산(三角山), 개성의 송악산, 강원도의 설악산과 금강산, 오대산, 황해도 구월산, 평안도 묘향산 등도 모두 산주가 있는 명산인데 특히 묘향산 산주는 품성이 넉넉하고 인자하여 학인들을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역대로 좌도(左道) 방면의 잔공부(小術)로 성공한 술객(術客)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인(大人)은 안나왔다.
이상이 봉우선생의 구술(口述)에 근거한 우리나라 산신(山神)일화의 대강이다.
한국단학회연정원 대전지부에 속해있는 회원입니다.
수년 전 봉우사상연구소를 알게 되었고 좋은 자료가 있어 복사해서 소장하고 소 책자로 보아오다가 브로그를 정리하며 올려놓았습니다.
혹시 저작권 문제를 말씀하신다면 삭제하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붕 배상.
〈 추기 〉 계룡구선 鶏竜九仙 : 太天
1. 座長 수정 구 봉 亀 峰 송익필 宋翼弼
2. 삼불 율 곡 栗 谷 이 이 李 珥
3. 우 계 牛 渓 성 혼 成 渾
4. 삼불 남 명 南 溟 조 식 曺 植
5. 토 정 土 亭 이지함 李之函
6. 고 청 孤 菁 서 기 徐 起
7. 중 봉 重 峰 조 헌 趙 憲
8. 제 봉 霽 峰 고경명 高敬命
9. 기허당 騎虚堂 영 규 靈 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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