勿勿子 語錄
4. 우리나라 고유의 체술
우리나라에 옛 부터 전해오는 무술의 비밀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문자화 되어서 전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흩어진 가운데 야담으로 전해지고 설화로서 그 지방에 전해질 뿐이다.
이것은 당시의 정치가 그것을 전하도록 허용을 안 한 것이 주된 원인이요, 또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치던 방식이 공개되지 않고, 한 사람의 높은 수제자가 무예의 전부를 습득 못하고 한 기술이나 하나의 재능을 기르는데 불과하여, 무술의 가장 비밀스런 핵심부분을 실제로 시범을 보일 만큼 닦지 못하고, 입으로만 전해 주고 마음속으로 전해 받는 식이다.
그러나 다른 공부라면 모르되 무술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체득하지 못하면 사용이 불가능 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무술의 전모를 엿볼 수 없는 주원인이 된다. 그리고 후세 사람으로도 이 전모를 연구하려고 하기보다는 한 가지의 기술이나 재능이라도 습득함을 스스로 만족하게 한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염려해서 각 사람의 각 기술을 종합해서 근본적 체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무술을 중국 계통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것은 절대적 오해다. 혹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지 모르나, 그 비밀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내가 말하던 바이다.
먼저 수차에 걸쳐 얘기한 바와 같이 삼한 이전의 무술은 말할 수 없으니, 약간의 유적과 오래된 전설이 남았을 뿐인 관계요, 삼국시대를 말하면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해 올 당시에 수양제의 부하로는 중국 전래무술에 최대강자들로 상장(上將:지휘관급 장수)이 천명이요, 무사(武士)가 수십만 명이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수륙양로로 공격했으나 을지문덕의 한 번 공격에 그만 완전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것은 물론 지형에 익숙치 않은 수나라 병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형의 이점을 살린 작전에 말려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현대 군의 참모진들이 항상 말하는 바이요, 우리나라 장수들과 병사들의 무예가 수나라 병사들보다 우수해서였다는 것을 연구하는 참모진들이 없는 것은 유감천만의 일이다.
그 다음, 당 태종 이세민의 침략 때에도 당시 중국천하 아홉 주를 통일하던 용맹한 장수와 지략이 뛰어난 장수들을 천 명이나 인솔하고, 수없이 위험한 전투에 투입되었던 완전무장한 갑사(甲士)가 수십만 명이나 되었으나, 고구려의 영웅 개소문(蓋蘇文)에게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는 치욕을 당하여, 지금까지도 중국에서는 개소문과 당태종의 이야기들이 연극으로 상연되어 그 당시 참상을 국민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에 반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개소문을 일개 용맹한 장부로, 오히려 역적이라고 규정지어 학자들 사이에서는 입에 올리기도 창피하게 여긴다.
그러니 당시에 그의 병법이나, 무술훈련방법들을 연구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가장 한심한 일이다. 중국에서 본 연개소문 연극이 당시 사실과 부합되는지 아닌지는 내가 확실히 얘기할 수 없으나 중국인들이 전하고 있는 내용이 사실보다 축소는 되었을지언정 과장되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개소문이 당태종의 침략군을 맞으며 은인자중하고 있다가 한 번 반격하매, 개소문과 상대를 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상장(上將) 천 명이 개소문 한 사람을 대하는 꼴이 바로 호랑이가 양떼 속을 휘젓고 다니는 격에 비유하였고, 개소문과 비록 승부에 차이는 있으나, 절대절명의 위기일발의 상황에 처한 당태종을 구한 사람은 중국인 무장이 아니라 우리나라 장수인 설인귀(中山)였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 고대 무예의 독특한 점이 중국의 무예와는 달랐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요, 우리들의 조상으로부터 전해오는 무술의 비장함이 매우 우수했다는 것을 알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로 사대주의가 크게 번져서 우리의 역사를 전적으로 소멸시키며 위정자들이 당나라 풍속을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어서 전래하던 미품양속은 자취를 감추고, 혹 그 문화의 숨겨진 진수를 알고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이단적인 술사로 규정하였으므로, 천여 년을 경과한 지금, 어찌 당시 무술의 전모를 알 수가 있을까? 단지 이곳저곳에서 야담이나 설화로 전해지는 비밀스런 얘기들을 종합해서 갱생시키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나는 몸소 목격한 비전 하던 우리나라 무술을 본 그대로 잊지 않고 기록하고자 한다. 내가 중국 협의소설이나 각종 무술관계 책들에 나오는 무사들의 무술을 보았으나, 우리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본 무예 같은 것은 중국소설이나 야사에서는 못 보았다. 중국에서 무사협의들은 주로 18반무예(十八般武藝)를 습득해서 상대자와 승부를 다투고, 간혹 독특한 습득무예를 연구한 무사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검술에 있어서도 비검법(飛劍法)은 각국에서 듣지 못하던 것이다. 중국의 봉신연의(封神演義) 소설에서만 비검법(날으는 검법)이 있었으니, 그 후 실전에서, 역사나 야사에서는 그 흔적을 보지 못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비밀리에 전해오는 것을 내가 목격했다. 이것을 [을병정삼기검(乙丙丁三奇劍)]이라고 하는데, 내가 목격은 했으나 그 진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그저 약간의 방식을 귀로 들었을 뿐이다.
그 다음은 비신검법(飛身劍法)이라는 것으로, 습득자의 높고 낮은 습득 정도에 따라 몸이 날아가는 거리의 장단은 다르지만 내가 목격한 그 사람은 한번 쌍검을 휘두르면 천리왕복이 호흡지간이었다. 그 주변에 있는 가까운 이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 분은 아주 고단자라고 했다.
그 다음은 분신검법(分身劍法)으로, 일당 천(一當千), 일당만(一當萬)이 자유자재한 법이다. 이것은 비록 야사가 확실히 전하지 못하나, 중국에서 조자룡의 장판교 전투가 혹 이 종류가 아닌가 한다. 그래도 내가 본 분신검법만은 못한 것 같다.
팔선검(八仙劍)이나 오행검(五行劍)이 모두 중국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예 중에서 대략 검법 한 분야에서만으로도 중국 전래검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대 일본검법이나 서양의 펜싱 정도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니 현 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다. 이것을 현대인들은 차력(借力)이라고 한다. 어디에서 힘을 빌리리요? 모두 스스로 연습하여서 성공한 것이다. 그 역량이 불가사의할 만큼 증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다음이 체술이다. 중국의 용권(龍拳), 일본의 유도(柔道), 서양의 권투(拳鬪)나 레슬링 등이 현 세계에 공통된 체술이나, 우리나라에 전래하는 체술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탁견법(托肩法)이 있고, 또 체술이 있었다. 탁견법(托肩法)은 지금도 전해오지만 체술법은 전해오지 않는다. 그 전래하는 체술의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유도나 권투, 권법, 레슬링 등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확대법(擴大法), 원근법(遠近法), 격타법(隔打法), 경중법(輕重法)의 진수가 있었다. 이것이 우리 체술의 독특성이다. 물론 여기도 단계의 차가 있다. 그러나 고단자라면 타국의 체술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예전부터 공개하고자 하나 아직 공개할 만큼 습득한 신인(新人)이 없었던 것이 주원인이 되어서 시기를 고대하고 있을 뿐이다. 역량가감법은 내가 소년시절이었을 때 실제로 경험이 있었다. 비록 저급이나 그 경로를 상세히 알 수 있고, 보법(步法)도 속보법(速步法), 비보법(飛步法), 육지비등법(陸地飛騰法) 등의 구별이 있다. 이것은 내가 체험한 바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전공적으로 이것저것을 약술하여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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