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神의 世界

천상의 세계

검은바람현풍 2012. 2. 26. 19:59

천상의 세계

                    - 죽림사 http://juklimsa.org/board/bbs/board.php?bo_table=under05&wr_id=18 -

 

 

 

욕계 제2천인 도리천은 지상에 있는 가장 높은 신들의 세계이다. 따라서 도리천이 지상의 가장 높은 장소인 셈이다. 이 도리천 위에 도합 26개의 하늘나라〔26天〕가 층층이 쌓여 있으며 그 맨 위의 하늘의 세계마저 뛰어넘은 것이 붓다의 세계이다.

 

옛 신라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오는 불국사에 가보면, 거기 부처님 나라가 아름답게 조형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은 그 불국의 터전으로 들어서려면 옆으로 빙 돌아서 측면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원래는 거기 청운교 백운교로 곧바로 올라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마주 앉아 감로법을 전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다.

청운교과 백운교의 돌층계 계단 수는 총 33개 이다. 이는 33천인 도리천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도리천 위에 큰 사찰의 불이문(不二門)에 해당하는 자하문이 우뚝 서 있다. 불이(不二)란 번뇌와 해탈, 속(俗)과 성(聖), 더러움과 깨끗함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에, 불이문은 번뇌와 속된 마음을 돌려서 해탈 세계로 이르게 한다는, 궁극적으로 해탈과 번뇌가 둘이 아닌 경지로 이끄는 지극히 언어도단적인 불교의 정신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도리천을 지나서 다시 그 위 창공에 층층이 솟아 있는 하늘나라를 오른 후 그 불국으로 진입하는 막바지에 그러한 불이문이 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공간상에 구축해 내기란 굉장히 난해한 작업이어서 그렇게 깨달음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조형화시켜서 표현한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거기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생략된 공간을 설명해 가면서 나머지 천(天)에 대해서 애기해 보련다.

 

 

천상에 있는 욕계 4천의 세계

 

도리천 위 공중에는 야마천(夜摩天: 閻摩天)이 있다. 수미산 정상으로부터 8만 유순(56만 킬로미터) 높이의 상공에 있는데, 거기 공중 궁전 비나나(vinana)에 그곳의 주인인 야마(yama)가 거주한다. 야마는 최초의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최초로 죽은 자이기도 하다. 그는 죽음의 길을 개척해 나갔으므로 그 후 죽은 이 들은 그 길을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야마는 죽은 이들과 더불어 야마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 왕국이 하늘에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은 낙원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 야마는 지하 아귀계(死者의 세계) 왕으로도 군림하게 된다. 여하튼 그것은 서사시 시대에 전개된 나중의 일이다.

야마가 다스리는 야마국, 원래 그곳은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이었다. 아마 경전에서 말하는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죽어서 천상에 간다는 그 하늘나라가 여기인 듯싶다. 이곳 야마천에서는 음욕이 경미하여 포응만 하여도 서로 기쁨을 누린다. 이곳이 욕계 제3천이다.

 

야마천 위에는 도솔천(兜率天)이 있다. 이곳은 미륵(彌勒)보살, 내지는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이 머무는 곳. 그 도솔천의 산스크리트 명이 투시다(tusita)로서, 그것은 만족시킨다는 동사 원형 투스(tus)에서 나온 말로 모든 것이 만족된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족천(知足天)으로 번역되며 상족(上足), 묘족(妙足), 희족(喜足)도 그와 비슷한 의미이다. 그 음역이 도솔천 또는 도사다천(覩史多天)이다. 여기서는 음욕이 더욱 경미해서 서로 손만 잡아도 만족된다. 그렇지만 이곳도 욕심의 세계이기에 욕계 제4천이라 부른다. 그런데 사실 도솔천은 극락정토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도솔정토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항목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겠다.

 

도솔천 위의 욕계 제5천이 화락천(化樂天)이다. 그 산스크리트 명은 니르마나 라티(nirmana - rati)로, 니르마나는 자유스러운 변화 내지는 창조를 의미하고 라티는 즐거움을 뜻한다. 신통력을 부려 자신의 욕망을 질적으로 잘 변화시켜 즐거운 생활을 하기에 화자재천(化自在天), 또는 낙변화천(樂變化天)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의 주인은 수니르 미타, 마주 서서 웃기만 하여도 음욕이 만족된다.

 

화락천 위에 욕계의 마지막 천이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그 산스크리트 명은 파라니르마나 바샤바르틴(paranirmana vasavartin). '파라(para)'는 자기가 아닌 상대방이며 니르마나는 앞서 말한 변화나 창조, 바샤바르틴은 통치하다는 뜻. 결국 이 말은 자신만이 아닌 남으로 하여금 그 욕심의 경지를 욕심이 아닌 것으로 돌려 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타화락천(他化樂天)으로 한역되기도 한다. 서로 보기만 하여도 음욕이 만족된다. 이곳의 주인은 자재천주(自在天主)이다.

 

이상이 사왕천과 도리천과 더불어 욕계 6천의 전부이다. 여기서는 한 단계 한 단계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라갈수록 욕심이 경미해지기는 하지만 아직 감각적 본능적 욕망인 식욕과 음욕이 살아 있어서 그 욕심의 테두리에서 기쁨을 누린다.

 

 

욕심을 떠난 색계(色界), 형태를 떠난 무색계(無色界)

 

이러한 천상의 세계는 지상과 지하의 세계와 더불어 독특한 불교의 세계관을 형성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그 세계 위에 선정(禪定)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데서 불교의 독창적인 모습이 확연하게 들어온다. 그 선정의 세계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이다. 색계에는 18천이 있고 무색계에는 4천이 있어 도합 22천인데, 이것을 제60항에서 말한 욕계 6천과 합치면 28천의 세계가 전개된다.

색계 18천, 그곳은 식욕과 음욕 등 모든 욕심을 떠나 있으며 물질이 청정하고 훌륭하게 자리 잡힌 세계이다.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음식도 필요 없고 분노도 없다. 그에 따라 배설된 분뇨도 있을 리 만무하다. 바로 욕심이 없는 형상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서 사는 생명들은 어디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평정한 무심으로 마음이 통일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형상의 속박으로부터는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이다. 그러한 욕심을 떠나 마음에 평정이 가득 넘치는 단계를 선정(禪定)과 연관시켜 보겠다. 여기에서는 네 가지 선(禪)이 전개된다.

우선 초선(初禪)의 단계에서 욕계(欲界)를 자각하고 욕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정을 닦는다. 그 결과 마음에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는데, 그만 여기서는 그 기쁨과 즐거움에 묶이고 만다. 신들 중에 최고신인 범천(梵天) 브라마(brahma)가 초선에 머문다. 상세히 말하자면 여기서는 밑에서부터 차례대로 3개의 하늘이 펼쳐지는데,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대범천(大梵天)이 그것이다. 대범천이란 바로 브라마를 말하며, 범중천은 대범천이 다스리는 백성들, 범보천은 그를 옆에서 보필하는 신하나 식구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색계에 들어서더라도 초선의 단계에서는 힌두 신화가 엿보인다. 범천은 힌두교의 최고신으로도 군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범천도 불교의 선(禪) 속으로 들어왔으므로 신 그 자체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신이 상징하는 이욕(離欲)과 정행(淨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사다가타 아키라(定方 晟) 교수는 말한다. 부파불교의 학승들은 인도 신화에서 중요한 범천의 자리를 그렇게 확보했을 것이다.

제2선(二禪)은 제1선에서 맛본 기쁨과 즐거움에서 떠나기 위해서 선정하는 단계이다. 여기서는 마음이 고요한 삼매에 들어 대상을 헤아리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그러한 삼매에서 얻어지는 기쁨에 얽매이게 된다고 한다. 아직도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밑에서부터 순서대로 소광천(小光天), 무량광천(無量光天), 극락광천(極樂光天)이 전개된다. 바로 빛으로 상징되는 덕으로 충만된 세상이다. 『화엄경』에서는 이곳에 광음천자(光音天子)가 머물며 희광적정(喜光寂靜)의 법문에 안주한다고 말한다.

제3선(三禪)에서는 삼매의 기쁨에도 구속되지 않고 마음이 평범한 무관심의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한다. 그리스 철학의 개념으로 마음의 평정을 의미하는 아타락시아(ataraxia)의 상태라고 말하까. 기쁨도 없고 줄거움도 없다. 그러니 여기서도 참된 기쁨인 묘락(妙樂)은 있다. 아마 진리 그 자체와 하나가 되었을 때의 기쁨으로 전혀 호들갑을 떨지 않는 적정한 상태에서의 흡족함일 것이다. 여기서도 밑에서부터 소정천(小淨天), 무량정천(無量淨天), 변정천(遍淨天) 3개의 하늘이 층층이 전개되는데, 『화엄경』에서는 이곳의 주인을 변정천이라 부른다.

제4선(四禪)은 모든 감각과 분별에서 벗어나 청정한 상태로, 기쁨과 즐거움을 초월한 그야말로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이 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8개의 하늘이 그야말로 높푸르고 선명하게 미세한 차이를 간직하면서 솟아올라 있다. 『화엄경』에서는 과실천자(果實天子)와 정거천(淨居天)이 이곳의 우두머리가 되어 머문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형상에 대한 속박이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색계 18천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무색계(無色界) 4천(天)이다. 이곳은 물질을 떠나 깊이 선정에 든 자가 머무르는 공간으로 사실 공간의 개념을 떠나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첫째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은 공무변처정(空無遍處定)에 들어선 사람이 머무는 하늘로, 내외의 모든 물질과 대상을 공(空)으로 관한 결과 마음이 허공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허공이라는 어떤 것을 사고 대상으로 삼아 거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둘째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은 마음이 허공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애서 빠저나와 일체의 사고 대상이 배제된 세계, 그래서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접어든, 식무변처정(識無遍處定)에 들어선 사람이 머무는 곳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고의 대상을 모두 배제했다""는 '사고〔의식〕가 존재한다.

셋째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은 그러한 의식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소유의 세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는 그 '없다'는 생각에 구속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공(空)이나 무(無)에 얽매어 있는 것이다.

넷째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이다. 비상(非想)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머물러 그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매몰되기에 비상(非想)을 부정해서 비비상(非非想)이라 한 것이다. 이것마저 부정하면 비비비상(非非非想)이 될텐데, 그렇다면 "생각한다, 안한다"라는 방식으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비상' '비비상'이라는 형식으로 동시에 부정하면서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 이상 사유를 진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것마저 부정한다. 왜일까?

거기에는 '사유'라고 하는 미세한 인위적 조작이 아직까지 꿈틀대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티끌이나 흔적마저 자취 없이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멸진정(滅盡定)이라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것은 바로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을 합한 28천 모두는 조작된 유위(有爲)의 세계, 곧 집착의 세계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모든 것을 멸한 자리다. 거기서 불이(不二)의 경지, 유마거사의 침묵이 사자후를 토하는 것이다. 불국사의 자하문은 그러한 불이의 이치를 보여주면서 거기에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것이다.

 

 

신들의 세계, 수미산 도리천(宧利天)

 

불교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로부터 해탈을 추구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지구며 태양도 그 굴레 속에 떠돌기 마련이다. 오직 붓다의 세계, 깨달음의 자리만이 윤회를 떠나 청정한 미소를 그야말로 상큼하게 흘려보낸다. 그 윤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지옥의 세계로부터 해서 맨 위의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모색이 결국은 불교의 세계관으로 갈무리지어 놓는다. 그래서 거기에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 아수라(阿修羅), 인간, 신들의 세계가 층층이 싸이게 된다.

불교철학의 대사전이라 할 수 있는 『구사론(俱舍論)』 「세품(世品)」에 불교의 세계관이 잘 서술되어 있다. 그 대략적인 윤곽을 더듬어 가면서 불교 속에 나타난 신들의 거주 공간과 그 신들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허공 속에 원반 모양의 풍퓬(風輪)이 떠 있고, 다시 그 위에 그 보다 작은 수륜(水輪)이 올라서 있으며, 또다시 그 수륜 위에 금륜(金輪)이 포개져 놓여 있다. 금륜의 테두리에는 빙 둘러가면서 철정산(鐵井山)이 에워싸고 있는 데다가, 그 금륜 위에 9개의 산이 박혀 있는데 중앙에 높이 솟은 산이 수미산(須彌山)이다. 이 수미산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음과 더불어 그 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승신주(勝身州), 남쪽에는 섬부주(贍部州), 서쪽에는 우화주(牛貨州), 북쪽에는 구로주(俱盧州)라는 네 개의 대륙이 물 위에 떠 있다. 이중에 남쪽에 있는 섬부주가 우리들 인간이 사는 곳이다. 사찰에서 스님들이 축원이나 재를 올릴 경우, 반드시 ""남섬부주, 대한민국, 무슨 시, 누구누구 아무개..... "" 하면서 그 서두를 꺼낼 때의 그 섬부주이다. 이 섬부주의 산스크리트는 잠부 드비파(jambu-dvipa). 즉 잠부의 음역이 섬부요 드비파는 주(州)를 말한다. 여기서 잠부란 그 열매가 달콤하고 모양새도 아름다운 나무의 일종을 말하는데, 인도 대륙에 이 잠부 나무가 무성하게 서식하여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다.

사실 경전에 나타난 남섬부주의 모습을 보면, 역 삼각형의 형태로 흡사 인도 대륙과 유사하다. 그러고 보면 수미산은 인도 북쪽의 눈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의 지상에서 최고 높은 산, 히말라야(Himalaya)를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수미산은 산스크리트 수메루(Sumeru)에서 음역된 말로서 묘고(妙高)를 뜻한다. 높을 뿐더러 신묘해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이 수미산 정상에 신들이 노니는 터전이 있다.

 

신들은 보통 허공에서 생활하거나 땅 위 높은 곳에서 거주하는데 그 히말라야 산맥의 수메루 산 위로 내려와서 모임을 같고 즐겁게 노닌다. 수미산의 꼭대기에는 1 변의 길이가 8만 유순(대략 56만 킬로미터)인 정사각형의 평평한 대지가 펼쳐져 있어서 거기 선견궁(善見宮)에는 신들이 모여살고 있으며 신들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드라〔帝釋天〕는 수승전(殊勝殿)이라는 전각에 머무르고 있다. 그곳에 기거하는 신들의 무리는 총 33천이라 해서, 33명의 신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여기서 33은 인도의 수 개념에서 많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아무튼 그 33의 산스크리트 말이 트라야 트림사(traya-trimsah)이므로, 그 트라라(traya: 30)을 음역하면 도리(도利)가 되기에 그 33천을 도리천이라 했다.

 

 

인도에서 신으로 불리는 이유

 

인도에서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 신이라는 뜻의 인도말은 데바(deva) 또는 수라(sura)이다. 이 두 말은 모두 빛나다(dive, svar)라는 뜻의 동사 원형에서 나온 말로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빛을 내는 물체, 즉 해, 하늘, 별, 색벽, 낯 등에 이 말이 적용되기에 이른다. 또한 수라는 하늘이라는 뜻의 스바라(svara)에서 파생되었기에 중국인은 이것을 천(天)이라 번역했다. 그러나 신이라 하지 않고 천이라 한 본래 이유는 당시 중국에서 쓰인 신이라는 말이 다분히 영혼을 의미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천은 동양인의 마음에서 이 세계를 지배하는 하늘나라의 님 들이 사는 곳, 좋은 곳으로 간직되어 있기에 그 신들이 사는 곳을 천(天)이라 이름 한 동시에 그 신들마저 그런 이름으로 불렀으리라 생각된다.

신의 또 다른 말인 '데바'를 보자. 데바는 '빛나는 자'일뿐더러 '주는 자'를 의미한다. 신이 데바인 것은 그들이 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신들은 죽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아마라(amara)라고 한다. 마라(mara)란 바로 마(魔)로 번역되는 말로 죽인다는 동사 원형 mr에서 파생되었다. 여기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a)가 붙어 불사(不死)를 의미하는 아마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밖에 이들 신들의 특징을 보면 이렇다. 땀을 흘리지 않고 눈을 껌벅이지 않으며. 발을 땅에 디지지 않을 뿐더러 그림자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 뿐, 도덕적인 면에서는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술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며 난동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신격화된 인간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적 존재이기에 그들 또한 욕심을 떠나 있지 못하므로 불사를 누린다 할지라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 역시 하늘에 사는 중생인 것이다.

신을 지칭하는 라틴어는 데우수(deus)며, 그리스어로는 테오스(theos), 그 그리스 신의 제왕도 제우스(zeus)이다. 그리고 창공의 신 디야우스(dyaus)는 데바와 동일한 어근에서 나온 인도의 신으로 그리스의 제우스나 로마의 쥬피터처럼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그래서 인도철학의 거장, 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은 말한다. ""이 '창공의 신' 디야우수(dyaus)는 인도 -이란 어족의 신일 뿐만 아니라 인도-유럽어족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그리스의 제우스, 이탈리아의 쥬피더(jupiter)이다."" 유신론을 의미하는 영어가 또한 테이즘(theism)임을 보건대 산스크리트는 진정 언어의 바다인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육도 윤회의 중생들

 

수미산 중턱에는 사왕천(四王天)이 있는데, 거기서는 사천왕(四天王)이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면서 지상과 지하의 중생을 다스리고 있다. 앞서 말한 도리천과 이 사왕천은 신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지상에 속해 있으므로 지거천(地居天)이라 한다. 이들에게는 남녀의 구별과 음욕이 있다. 그래서 사왕천을 욕계 제1천이라 하고 도리천을 욕계 제2천이라 한다.

사왕천 밑에 인간이 거주하는 섬부주가 있고, 수미산 주변의 바다에는 아수라(asura)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인간과 축생 사이에 있는 존재로 성질은 인간들보다 고약하지만 그 힘은 신을 능가할 만큼 세다.

다시 그 섬부주 밑에는 축생과 아귀들이 사는 야마 왕국(閻摩王國)이 펼쳐진다. 이곳은 인간이 죽어서 가는 세계이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야마(Yama)는 최초에 죽은 자로서 그는 하늘나라에 젖과 꿀이 넘치는 왕국을 건설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늘 세계를 다스리던 야마가 다시 지하로 숨어든다. 이 두 인물이 동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둘 사이의 유사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천상의 야마국이건 지하의 야마국이건 간에 그곳은 죽은 이들이 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지상에서 지하에로라는 시대와 사상의 변화에 따른 구조의 재개편이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천계와 아귀계를 다스리는 두 사람의 야마가 있는 셈이다. 그래서 천계를 다스리는 야마는 염마(閻摩)로 표기하고 아귀계를 다스리는 야마를 염마(閻魔)로 표기하는 학자도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야마를 염라(閻羅)로 규정해 본다. 사실 지옥의 세계를 다스리는 염라대왕이 여기서 왔기 때문이다. 결국 하늘 세계에 있던 야마가 아귀계로 내려오고 다시 지옥계로 더 하강한 셈이다.

망자(亡者)들의 혼을 일러 귀(鬼)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간자, 또는 떠난자를 뜻하는 프레타(preta)에서 온 말이다. 조상의 영혼은 피타르(pitar)이며 아귀는 프레타이지만, 이 둘은 속어의 형태인 페타(peta)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들의 조상인 그 죽은 이 들이 바로 귀(鬼)가 되는 것이다. 그 죽은 이 들은 대체로 비참한 경지에 처해 있음으로 해서 훗날에 굶주려 있다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아(餓)자가 첨가되어 아귀(餓鬼)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망령에도 두 가지 부류가 있어 덕이 있는 망령은 동산이나 나무 위에서 즐겁게 노닐기도 하며 때로는 그 지하의 세계를 탈출하여 공중에서 노닐기도 한다. 반면 덕이 없는 망령들은 배가 동산만큼 부풀어 있으나 목구멍이 바늘구멍만큼이나 가늘어 음식을 제대로 삼킬 수 없을 지경이니 항상 기아에 허덕이기 마련이다. 항상 굶주림에 목말라 있지만 음식을 넘길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 계속된다. 얼마나 굶주렸는지 주린 배를 채우려고 음식만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라붙는다. 일러 아귀다툼이라 하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상황을 대략 짐작할 만하다.

이 밖에 어떤 망령들은 입에서 불길이 솟아나와 그 주변을 맴돌던 나방이 갑자기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뜻밖의 식사를 하는 아귀도 있으며, 대소변. 콧물, 고름, 세척기의 부착물을 먹는 망령들이 있다 한다.

 

이 아귀들이 사는 세계 밑에 지옥이 펼쳐진다. 지옥, 그것은 끝없는 추락을 의미하는 말로 나락카(naraka)라 한다. 그 음역이 나락(奈落)이다.

인도 신화는 이들 여러 중생들의 삶의 방식과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얘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관찰한 세계 내의 일이며, 보다 낳은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적 삶의 투영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이들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인간 윤회(輪廻 ; samsara)의 싸이클에 맞춘다. 윤회는 인간 행위의 결과에 따른 삶의 조건이다. 여기서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로 들어가서 윤회하는 모습을 삼악도(三惡道)라 하고 아수라, 인간, 천의 세계로 윤회하는 모습을 삼선도(三善道)라 한다. 그러나 악도(惡道)이든 선도(善道)이든 그것들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탐욕과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돌고 도는 윤회의 길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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