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
硏精會報 16 호 에서
[ 1762년 영조 38~1836년 (헌종 2), 本貫은 나주(羅州). 字는 수시(美庸), 號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 시호는 문도(文度), 주요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
고매한 인품과 방대한 저술, 특히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實學) 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集大成)하여 실학의 체계를 이룩하신 분으로 이름이 높은 정약용 선생은 영조 38년(1762) 진주목사 정재원(鄭載遠)의 아들로 지금의 경지도 광주(廣州)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은 문장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7세에 이미 ‘小山藏大山 遠近地不同-작은산이 큰산을 가리우니 멀고 가까운 거리가 같지 않음 이로다.’ 라는 詩를 지으셨을 때 선생의 아버지가 그 시를 읽으시고 장차 산수와 역법에 능할 것을 예감하며 기뻐 허셨다고 한다. 이때 마침 선생은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 위에 흔적이 남아 세눈썹이 되어 선생을 삼미자(三眉子)라 불렀고 10세 이전의 작품을 모아 삼미집(三眉集) 이라 하였으며 이 삼미집은 선배들의 격찬을 받았다.
선생은 22세에 생원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에 올랐으며 정조 말년에는 서교(西敎)에도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하시다가 1801년 천주교 박해를 위한 신유사옥 때 이가환(李家煥) 李승훈(李承薰) 정약종(鄭若種) 정약전(鄭若銓) 등과 함께 체포되어 형 약종은 장사되고, 약전은 흑산도로, 선생은 강진으로 규양 가셨다. 선생은 귀양지 강진의 다산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선생의 대부분의 저서는 이 적소에서 완성되었다.
선생의 저서는 그 양이 방대할 뿐 아이라 그 내용 또한 사회 경제 사상에 걸쳐 정박명절하며 탁견 아닌 것이 없어 단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 범인으로서는 그 능력에 대해 과연 선생은 어떻게 그 많은 저서를 집필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선생이 곡산부사로 계실 때의 일이다. 동헌 뒷산 기슭에 돌 틈으로 물이 새어 나오는 곳이 있었는데 선생은 어느 날 이곳을 인부를 시켜 방광형으로 파게 하였다. 그리고 날씨가 몹시 추운 날을 골라 밑에 유지를 깔고 물을 대어 약 7~8치 높이로 물길을 막고 물을 얼리고 또 그 위에 왕겨를 덮고 또 유지를 깔고 전과 같이 다시 물을 대어 얼렸다, 이렇게 수차 거듭하여 마지막에는 그 위에 짚을 덮어두었다. 그 다음해 여름 6월에 청나라로부터 사신이 황해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연도의 각 역에서 얼음을 구하였으나 얻을 수가 없었다. 이때 선생은 곡산의 얼음을 풀어 음식물의 부패를 막았을 뿐 아니라 사신 일행의 염천삼복더위를 시원한 얼음으로 만든 청량음료로 식히고 갈증을 풀어 가는 길이 유쾌했다 한다. 이때 수입된 돈은 곡산군의 공용으로 썼다 하니 선생의 예지(預知)와 애민심(愛民心)은 참으로 우러러 뵐뿐이다.
이 밖에도 선생의 치적과 깜짝 놀랄 진기한 얘기는 무수하지만 선생이 서교(西敎)에 연루되어 찰방으로 좌천 되었을 때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이 계시던 고을에 묘 자리를 잘 잡아주는 중이 있었다. 소위 명당자리를 잡아주는데 그 자리는 반드시 “어느 날 아무개가 묘를 쓰면 발복한다”는 표적이 나무패에 쓰여 땅속 한자의 깊이에 묻혀있다고 하며 특히 묘 자리를 미리 잡아 두고 나중에 쓸데 쓰면 발복한다는 소문이 퍼져 돈 있는 집에서는 미리 묘 자리를 구해놓으려는 소동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땅 판 흔적도 없는 곳에서 나무패가 나오니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선생은 당장 그 중을 잡아들이라 엄명을 내렸다. 아전이 그 중을 잡아 대령하였더니 선생께서는 아무 말도 묻지 아니하고 무조건 볼기를 치라고 명을 내렸다. 중은 볼기를 맞으면서 억울하다고 큰소리로 호소하였다. 선생은 그제 사 매를 멈추게 하고 중이 보는 앞에서 사령들로 하여금 매 맞은 자리를 가르키며 두자 깊이로 땅을 파게 하였다. 땅을 파 보니 그곳에 나무패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요승 아무개가 모년 모월 모시에 매를 맞는 자리라고 적힌 것이 아닌가?’ 중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용서를 빌었고 다산선생은 엄하게 꾸짖어 옥에 가두라 일렀다. 며칠 후 그 중을 풀어주었는데 그 후로 부터는 그런 일이 없었다 한다. (주위에서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무도 몰랐으나 그 중과 다산선생은 그 까닭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찰방으로 계시던 때의 일이다.
하루는 어릴 때의 친구 한 분이 찾아왔는데 행색이 남루하고 초라하여 가난에 찌든 사람임을 곧 알 수 있었다. 그 선비는 사실 극심한 가난으로 끼니를 예사로 걸러야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의 친구 다산과 더불어 인의(仁義)니 이기(理氣)니 하는 얘기로 며칠을 지냈다. 이 친구는 당시 생원 선비들이 다 그러하였듯이 그도 역시 먹고 입는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인의 만 찾는 선비로서 다산 선생을 안타깝게 하였는데 그 선비가 떠나려고 하자 선생께서는 2~3일 후에 떠나라고 하시며 말리셨다. 그러자 이 친구는 속으로 은근히 ‘노자라도 마련하려는가 보다’ 하는 기대를 하면서 못이기는 척 머물러 있기로 하였다. 며칠이 지나 떠나려고 인사를 하자 다산선생께서 돌아 갈 길을 상세히 말 해 주면서 꼭 그곳을 지나가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곳에 누구에게 긴한 전할 말이라도 있느냐고 묻자 한참 후 편지 한 장을 써주면서 하는 말이 “내 자네에게 노자를 못주어 미안하이, 그러나 집에 돌아가는 데는 걱정 없을 걸세” 하였다. 그리고 그 친구는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서 있는데 다산 선생께서 하인을 불러 한말들이 가루부대 선물을 주자 푸대접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선생이 어릴 때부터 자기보다 한 수 위였던 터라 기이한 생각이 들어 “이것이 무엇에 쓰는 것인가? ”하고 물어보니 선생은 글 쓴 것을 내어주면서 “이 글을 그 고을 좌수에게 보내는 글일세. 좌수라고 보내는 글이 아니고 내가 밑을 만 한 사람이라 그러니 이 약을 가지고 가 그 집에 유하면서 고을 사람들을 치료 해 주게나. 이 약은 절대로 한 숟갈 이상을 주어서는 안 되네. 그 이상을 주면 큰일 나네, 하면서 빙긋이 웃자 그제서야 그 선비는 그 약이 귀한 약인가보다 생각하고 한말이면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아까 노자 못 받아 부어올랐던 양 볼에는 희색이 만연하게 되었다. 속으로 낑낑거리며 돈 계산을 하고 있는데 다산 선생이 ”자네 그러면 못써! 그 반 만 받게, 그리고 이 약만으로는 낫지 않아, 한 가지 더 약방문을 가르쳐 줌세. 그 약은 나에게는 없지만 어느 곳에서나 구할 수 있네. 그러나 좀 우스운 일을 하여야 하네. 하고 빙그레 웃으셨다. 속마음을 들킨 선비는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다음 약방문을 모르고서는 가루약이 소용이 없는 터라 “ 그것이 무엇이지”하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대답은 안하시고 “언제든지 약 값은 반 만 받게나. 그것을 약조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네 하시고 엄숙하게 말했다. 자기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하는 말에 기가 질리고 또 그나마 생기게 된 돈을 놓치게 될까봐 그 선비는 그렇게 하마고 약속했다. 그러자 선생은 ”그러면 약속을 지키겠네. 그러나 이 약은 어느 고을 까지만 쓰게. 그 고을이 지나면 효력이 없을걸세. “ 하였다. 친구는 기이한 약도 있군, 곳에 따라 약효가 없어지다니, 옳아 이 친구는 나를 놀리는게야 하고 생각하였다. 계속해서 선생이 약 방문을 말씀하시는데 ”이 가루약은 한 숟갈을 한 집안 식구가 나누어 먹고, 돼지나 개의 가죽을 아픈 사람이 덮어쓰고 하루만 지나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약 부대와 길양식을 가지고 어느 고을까지 모셔다 드리고 오라고 하여 동구 밖까지 전송하여 주었다. 친구는 노자 한 푼 안 받았지만 가루부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차서 발걸음도 가볍게 떠나갔다. 그 선비는 일러 준 고을에서 한 보름 묵으면서 대접을 잘 받고 약 장사도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신통하게도 그 약 방문이 잘 들어 유행병에 걸려있던 많은 사람들이 나았다. 그러다 보니 그 소문이 인근 마을에 까지 번져가서 돈 없는 이는 개나 돼지부터 먼저 잡아먹었으나 그것으로도 신기하게 병이 잘 나았다. 그러던 중 그 선비는 가루약을 만드는 방문을 모르는데 약은 거의 바닥이 날 지경이라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고 돈을 이제까지 보다 두 배로 더 받기로 하였다. 그래도 며칠 동안은 약이 그럭저럭 잘 나갔다. 그러더니 며칠 후 부터는 환자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고을을 그만 떠나기로 하고 좀 남은 약을 처분 할 생각으로 길가 주막에 들렀는데 웬 사람이 개가죽을 쓰고 주막에 들어왔다. 자기가 가르쳐주지도 안았는데 개가죽을 쓰다니 하고 물어보니 하는 말이 ”개고기만 먹어도 병이 나았는데 그까짓 약 비싸게 사 먹을 이유가 어디 있겟어요?“ 하였다. 그 선비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한다.
이상의 얘기는 다산 선생의 간직한 재주의 한 단면을 말 한 것에 불과하다.
선생은 벼슬길에 올랐을 때나 귀양살이를 할 때나 저서에 힘을 기울여 여유당집(與猶堂集) 250권, 다산총서(茶山叢書) 246권, 기타 문집 9권 등 모두 508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방대함은 말 할 것도 없고 평생을 통하여 천문(天文), 지리(地理), 정치(政治) 경제(經濟) 군사(軍事) 농업(農業) 공업(工業) 의학(醫學)복서(卜筮) 산수(算數) 등, 실로 통하지 않은바가 없었으니 어찌 인간의 한계를 벋어난 분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오직 유시(幼時)부터 수련한 단학(丹學)에서 얻은 오묘한 힘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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