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궁화와 한민족
무궁화는 태고 단군조선이 세워지기 이전인 신시시대(神市時代)
환나라(桓國)의 나라꽃인 '환화(桓花)'로 나타나 오늘날 까지
오천여년 동안을 배달겨래와 동고동락을하며 자연스럽게 겨래의 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먼저 무궁화와 한민족과의 관계에 앞서 우리나라에 대한한자명칭을
국내외의 옛 문헌을 통하여 수집한 권상로(權相老 1879~1965)의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 부록7, "국명의 이칭(異稱)"에 의하면
그 수가 무려 194가지나 된다고한다.
이들을 크게 구분해보면 근방(槿邦), 근역(槿域), 근화향(槿花鄕), 근원(槿原) 등의 명칭은
무궁화를 뜻하는 근(槿)자가 들어있어 "무궁화의 나라"를 의미하고
단국(檀國), 단기지방(檀箕之邦), 신단(神檀), 진단(震檀), 단방(檀邦) 등은 단군과 관계되는 명칭이며
대동(大東), 동구(東區), 동방(東邦), 일역(日域), 일방(日邦) 日出墟(일출허) 등의
명칭은 "동방의 해뜨는 나라"의 의미로 가장 종류가 많았고 군자국(君子國),
예의지방(禮義之邦), 선인국(仙人國) 등의 명칭은 예의 있는 나라임을 뜻하고 있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문헌상의 기록 또는 관련된 사건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시시대에는 무궁화를 환화(환화)라하여 환국(환국)의 꽃으로 불려졌으나
단군조선시대에는 환화(환화), 근수(근수), 훈화(훈화), 천지화(천지화)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내고 있었는데 "단기고사"에 "16년(제5대 단군 丘乙 16년은
기원전 2090년 즉 지금으로부터 4088년)에 임금께서 고력산(古歷山)에 행차하여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주변에 무궁화를 많이 심었다
(十六年帝行幸古歷山築祭天壇多樹周邊以槿樹)"라고 적고 있으며
또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16년 정축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를 많이 심었다
(丁丑十六年親幸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 라고
제5대 단군 구을(丘乙)에 대한 사실(史實)을 적고있었다.
한편 동양의 역사. 지리. 민속. 종교 등을 총망라하여 기록한
대표적인 기서(奇書)인 산해경(山海經)은 요순(堯舜)의
禹임금(BC 2183~2175 : 우리나라 단군조선시대))때
백익(伯益)이 저작하였는데 이책의 제9권 "海外東經"에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그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차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큰 호랑이를 부린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으며 그 땅에는 훈화초(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劒 食獸 使二大虎在旁其人好 讓不爭 有薰(或作菫)華草 朝生夕死)"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시대에는 "최문창후문집(崔文昌候文集)권1표 가운데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라는 것이있는데
이것은 신라의 효공왕 원년(897년)에 최치원이 임금의 명을 받아 당나라의 광종에게 쓴 국서가운데
" 무궁화 나라(신라를 일컬음)는 염양한데 점점 쇠약해 가지만
고시국(발해)은 강포한데도 더욱 강성해 가고있다(槿花鄕廉讓自沈?矢國毒痛愈盛)"라고
스스로 근화향(무궁화 나라)이라 하였으며 또 고려시대에는
고종때의 문장가로 유명한 이규보(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
14의 고율시(古律詩) 가운데 장노 문공과 동고자(東皐子) 박환고가
각기 근화(槿花)의 이름을 두고 논하는데 한사람은 "무궁화는 곧 무궁(無窮)의 뜻이니
꽃이 끝없이 피고짐을 뜻함"이라 하였고
또 한 사람은 "무궁은 곧 무궁(無宮)이니 옛날 어떤 임금이 이 꽃을 사랑하여
온 궁중(六宮)이 무색해졌다는 것을 뜻함"이라 하였다.
이처럼 각자가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므로 끝내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백낙천(白樂天)의 시운을 취하여 각기 한편씩을 짓고
또 나(이규보)에게도 화답하기를 권하였다
(長老文公東皐子朴還古各論槿花名或云無窮無窮之意謂此花開落無窮或云無宮無宮之意謂昔君王愛此花而六宮無色各執不決因探樂天詩取其韻各賦一篇亦勸予和之)라는
기록은 중국문헌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는 "무궁화(無窮花)"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타났다.
이조시대에는 세종 25년에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무궁화"라는 한글명칭이 쓰이게 되었으며
실학자들의 실학서적에 무궁화에 대한 많은 기록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종때의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무궁화 애호가였던 안사형(安士亨)이 항의한 글을 보면 "목근(木槿)은
본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화목인데 형은 그것을 화보에도 수록하지 않았고
또 화평(花評)에서도 논하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는지요? ----
우리나라에서는 단군께서 나라를 여실 때에 이미 목근화가 나왔기 때문에
중국사람들은 동방을 반드시 근역(槿域)이라고 말하였으니 근화는
예로부터 ---"라고하였으며, 최세진은 사성통해(四聲通解)상권에서 "근은 츤이다.
목근화를 무궁화라고 부른다(槿, ?也 , 今俗呼木槿花, 무궁화")하였고
기타 최세진의 "훈몽자회" 허준의 "동의보감",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익의 "성호새설", "만물보", "譯語類解" 등 여러 문헌상에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사화(御賜花), 진찬화(進饌花) 등 궁중행사에도 사용해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일합방 전야(前夜)에 함녕전(咸寧殿)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모리오노리(森大來), 마스야아라스케(曾彌荒助),
이완용 등 합방의 주역들이 연회장에서 다음과 같은 합작시를 지었다.
"단비가 처음내려 만사람을 적셔주니(甘雨初來霑萬人-伊藤)
부상(일본)과 근역(우리나라)을 어찌다르다 논하리오(扶桑槿域何論態 - 曾彌)
함녕전위에 이슬빛이 새로워지니 (咸寧殿上露革新 -森)
두땅이 한집되어 천하가 봄이로다(兩地一家天下春 - 이완용)
또한 그간에 있었던 박해사건들을 살펴보면
동아일보는 1923년부터 10년에 걸쳐 '비 개인 아침에 새로단장한 무궁화'
"무궁화는 잘도핀다.' '무궁화는 제철만나' '날마다 새 꽃 피우는 무궁화'
' 철지난 무궁화' 등 무궁화에 관련된 사진과 설명을 개재하여 무언의 은밀한 저항을 표시하고,
1930년 1월1일에는 "동아일보" 제호의 바탕을 한반도지도와
무궁화로 매운 도안을 사용하여 오다가 1938년에 무궁화의 도안이 검열에 걸려
1938년 2월9일 부터는 삭제되었다가 1945년 광복후 환원되었으며
1937년에는 조선소년군 항건(項巾)에 새겨진 무궁화 화환이 문제가 되어 압수당하였고,
중앙학교의 교가에 "흰 뫼와 한 가람은 무궁화 복판" 이라는 구절이 있고
모표(帽標)도 무궁화 화환이 "中"자를 받치고 있던 것이 단속에 걸려 1938년 교가는 금지되고
모표(帽標)는 압수당하였다.
민족사상의 보급에 앞장서온 한서 남궁 억은 1931년에 "무궁화 동산"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무궁화를 보급하여 오던중
1933년 11월 2일 시조사원(時兆社員)을 가칭한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신현규에게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설명과 함께 사쿠라(벚나무)는 활짝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면연(綿延)히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의 역사가 면연할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 화근이 되어 70,000주에 이르는
무궁화가 불에 태워졌고 선생은 붙잡혀가 옥고(獄苦)를 치루게된
남궁 억의 "무궁화 동산"사건(십자가당 사건)이 있었다.
그외 근화여학교의 교복사건, 오산학교의 무궁화동산,
대구사범의 무궁화 동산사건 등 많은 시련을 격어왔다.
이러한 시련속에서 우리겨래와 연을 맺어왔지만 나라꽃으로
자리를 잡게된 배경에 대하여는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배재 80년사"에 나타난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정초식에서 불렀던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시원(始原)으로 하여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애국가가 국가(國歌)로 채택되면서 자연스럽게
무궁화가 국화(國花)로 자리잡게 되고 따라서
국기봉, 나라문장(國章), 대통령 표장(標章) 등 국가상징물과
국가기관의 기(旗), 훈장, 상장, 각종 뺏지 등에 활용하게 되므로서
모든 국민이 인정하는 명실공히 나라꽃으로 정해진 것이다.
무궁화를 국화로 반대하는 이유를 화훼연구가인 조동화(趙東華)씨는
2월 3일자 한국일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무궁화가 국화로 여겨지게 된 것은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구미의 신문화가 이 땅에 밀려오면서 오얏꽃(梨花)의 이조(李朝)왕조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으며
---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무궁화 재배를 공공연히 방해하고
"눈에 피꽃"이라는 터무니없는 모함까지 하는 바람에 무궁화는 오히려
"국화라는 명예로운 위치"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하였으며 국화가 될 수없는 이유를
첫째, 황해도 이북에는 심을수 없는 지역적 한정성이 있고,
둘째, 원산지가 우리나라가 아닌 인도라는 것이며,
셋째, 진딧물이 많아 청결하지 못하고 단명함,
넷째, 휴면기가 길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식물학자 이민재(李敏載)씨가 동의하고
국민적 합의절차나 법률규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국화(國花)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반면 무궁화 예찬론자인 호암 문일평(湖岩 文一平)과
영문학자인 이양하(李敭河)씨 등은 역사성과 무궁화의 특성을 여러 가지면에서 칭찬하였다.
이와 같은 국화시비론에 대하여 1956년 2월 28일 주요한(朱耀翰)씨는 "무궁화는 과연 '국화'인가?
그렇기도하고 그렇지 않기도하다. ---
"하여간 무궁화는 국화라고 법령화된 것은 아니지만
대소사전(大小字典)과 교과서 등을 들춰보면 우리나라 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으므로
'나라 꽃'이라고 말해 무방할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동아일보사 김충식 기자는 <명대결>이라는 제하로
1982년 7월 30일부터 8월 10일까지 9회에 걸처 논한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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